회고록서 "탄핵 복귀한 노무현의 장관 임명제청 요구 거절, 역린 건드려"
盧 "고건 총리 스스로 고립" 발언엔 "사실과 달라…盧 전 대통령이 고립된 것"
"17대 대선 불출마 선언…노욕 덮을 만큼 권력의지 강하지 못해"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고건 전 국무총리가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능과 오만 등을 비판하면서 박 전 대통령을 만든 보수 정치권에도 쓴소리를 했다.
고 전 총리는 1일 공개한 '고건 회고록 : 공인의 길'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정말 답답했다. 오만, 불통, 무능…. 하시지 말았어야 했다. 아버지 기념사업이나 하셨어야 한다"며 "당사자가 제일 큰 책임이 있겠지만, 그 사람을 뽑고 추동하면서 진영대결에 앞장선 사람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고 전 총리는 또 "박근혜를 검증 안 하고 대통령으로 뽑은 것 아니냐. 보수진영이 이기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진영대결의 논리이고 결과이다. 중도실용을 안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 전 총리는 지난해 본격적인 촛불 정국 도래 직전 박 전 대통령에게 진언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2016년 10월 30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사회원로 몇 명과 함께 차를 마시며 '국민의 의혹과 분노는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성역없는 수사를 표명하고, 국정시스템을 혁신해서 새로운 국정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촛불집회가 일어나고 탄핵안이 발의, 가결됐다"고 말했다.
고 전 총리의 회고록은 그가 걸어온 길 자체가 한국 역사의 한 장면, 장면임을 보여준다. 1962년 내무부 수습사무관을 시작으로 도지사, 장관, 시장, 총리,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했다.
고 전 총리는 머리글에서 "실제 공직에 있었던 시간은 다 합해 30년이지만 야인으로 지낸 20년 역시 공인의 마음가짐으로 살았으니 50년을 공인으로 살았다 해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며 "공인으로서 나의 삶은 우리나라와 서울의 현대사와 깊게 엮여 있기에 '무엇을 왜 어떻게 하려 했고 실제 어떻게 했는가, 또는 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회고의 기록을 남기는 일은 공인으로서 나의 마지막 의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내 회고담의 핵심주제라 할 '공인의 길과 소통의 문제'야말로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심적인 과제다. 국민으로서 정부의 무능은 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사의 혼돈과 독선은 참지 못한다"며 "지난 겨우내 광화문을 달군 '이것이 나라냐'의 절규는 바로 공인 정신의 소멸과 소통의 부재에 대한 전 국민적 절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라고 진단했다.
고 전 총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 총리를 맡게 된 과정 등에 대한 뒷얘기도 털어놨다.
그는 첫 만남에 대해 "1998년 서울시장 민선2기에 출마할 당시, 국민회의 노무현 부총재를 만났다. 인상적이었다. 그의 화법은 매우 담백했다.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드물게 사심이 없는 정치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37세 최연소로 전남도지사가 되는 등 늘 '최연소' 타이틀을 달았던 고 전 총리는 "나보다 나이 어린 상사를 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총리를 제안하면서 '개혁대통령'을 위해선 '안정총리'가 필요하다 했고, 완강히 고사해도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면서 "'해임제청권뿐만 아니라 실질적 내각인선까지 맡아서 해달라면서 다만 법무부 장관은 이미 생각해 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강금실 변호사였다"고 뒷얘기를 소개했다.
노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권한대행을 맡았던 시절에 대해서는 '내 인생 가장 길었던 63일'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탄핵소추에서 복귀한 날 청와대로 들어가 '이제 강을 건넜으니 말을 바꾸십시오'라고 사의를 표명했다"면서 "그런데 사흘 후 새 장관들에 대해 임명제청을 해달라고 해서 거절했더니 비서실장을 두세 번 보냈고, 마지막에는 내 사표를 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완전히 역린을 건드린 것"이라며 노 전 대통령과의 관계가 틀어진 배경을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이 2006년 12월 "고건 총리가 양쪽을 다 끌어당기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라고 말한 데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고 전 총리는 "완전히 사실과 다르다. 여야를 아울러서 국정을 수행한 건 나다. 내가 물러난 지 2년 후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했을 때는 노 대통령 본인이 고립됐던 건 사실인가보다. 노 대통령 스스로 고립된 거다. 나는 총리를 그만둔 지 몇 년 후 얘기다. 시계열에 대한 착각이 있었던 게 아닌가. 내가 총리일 땐 여야정 협의가 잘됐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해명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을 싫어하게 된 이유에 대해 임명제청 요구 거절을 우선으로 들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친노(친노무현) 세력에게 '고건을 밀지 마라'는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닌가 싶다고 짐작했다.
17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이유도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놨다.
고 전 총리는 "제일 큰 불출마 요인은 중도실용의 기치를 내걸고 내 정치세력을 못 만든 것이고, 또 하나는 호남 출신의 한계론"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의 정치적 실패를 놓고 보면 중도실용의 정치가 설 자리도 좁았지만, 비정당 출신 제3의 정치인이 설 자리가 더 좁았다"며 "참여정부의 총리를 해서 진보 쪽으로 포지셔닝이 된 상황에서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이 발생하니 역부족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불출마 선언을 하고 사흘 후인가 돌아왔더니 DJ(김대중) 쪽에서 보낸 정세현 전 장관이 '동교동에서 번의(飜意)하라고 하신다'고 전했다. 후원해준다는 얘기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으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고 열린우리당이 아무리 간판을 바꿔도 떨어지는 건 확실했다"며 "다음 대선에 재수로 후보가 돼야 하는데 나이가 DJ가 대통령이 됐던 만 73세보다 많아지는 거다. 노욕을 덮어버릴 만큼 권력의지가 강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noano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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