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출판기념 간담회…"적폐청산 목적은 시스템 혁신"
"정권은 임기 있지만 행정은 임기 없어…한계행정을 해야"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고건 전 국무총리는 "산업화 반세기, 민주화 사반세기가 지나 선진국 문턱에서 주저하는 지금 새로운 정치경제사회 틀을 만들어야 할 때다. 그러한 시대적 과제를 무시한 보수정부가 오만 불통했기에 민심의 촛불이 켜졌다"며 "시대발전 흐름을 봤을 때 변곡점에 와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또 "보수·진보 모두가 새 시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야정협의체 구성 등 환골탈태해야 한다"며 "대승적 차원에서 여야정협의체를 빨리 만들어주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고 전 총리는 지난달 30일 서울 광화문에서 개최한 '고건 회고록 : 공인의 길' 출판 기념 간담회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지켜 본 소회와 문재인 정부의 여야 협치를 위한 조언을 묻는 말에 이같이 답했다.
고 전 총리는 2013년에 출간한 서적 '국정은 소통이더라'가 2015년 메르스 사태와 지난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을 겪으며 인기폭발로 매진되자 언론 대담 내용 등을 추가해 이번 회고록을 펴냈다.
그는 간담회 인사말에서 "지난 50년간 변화하는 시대마다 시대적 과제에 대응하는 위치에 있었다. 나름의 원칙과 소신을 지키려고 애쓰다 보니 사표를 7번 썼고, 그 중 임명권자인 청와대에 반기를 든 것만 해도 4, 5번이 된다"며 "공직에서 중앙과 지방을 3번 왕복했다. 관과 민을 7번 왕복했다. 그 과정에서 행정시각을 스스로 교정했고, 실사구시의 행정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고 지난 길을 되돌아봤다.
고 전 총리는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해 "촛불민심이 바라는 것은 특권과 반칙이 없는 공정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적폐청산의 목적은 바로 그거다. 특권과 반칙이 없는, 재발하지 않는 제도개혁을 하는 게 근본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적폐청산에 대한 의견을 더 자세히 적었다. "특정세력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조사해서 처벌할 것은 처벌해야겠지만 기본 목적은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새로운 시스템의 혁신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특권과 반칙이 없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건 바로 국민통합으로 가는 길이다. 거기서 국민화합과 사회통합으로 연결된다.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고 전 총리는 간담회에서 현 정부의 시대적 과제를 묻는 말에 "촛불민심이 보여준 특권과 반칙이 없는 제도개혁. 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새로운 정치경제 사회의 틀을 찾아야 하는 게 과제"라며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제일 큰 문제가 탈산업화에 따른 고용 없는 성장, 일자리 문제, 이게 시대적 과제 가운데 중요하다. 또, 세계 유례없는 초고령사회 진전, 사회안전망 미비로 인한 소득 격차 확대, 이거 해결하는 게 시대적 과제"라고 힘줘 말했다.
그는 앞으로 계획에 대해선 웃으면서 "많은 공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혜택이라고 생각한다. 혜택받았던 것을 다 반납해야 한다. 시민단체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일이다. 기후변화센터도 창립해서 한다. 앞으로도 그런 건 계속한다"며 "한 번 공인이면 공인을 떠날 수 없는 것 같다. 잊힐 권리를 행사하고 싶은데 잘 안되는 것 같다"고 답했다.
고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공직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함께 '공직자의 자세'를 시종일관 강조했다.
그는 책에서 "정권은 임기가 있지만, 행정은 임기가 없다. 정권은 권력이기 때문에 임기가 있지만, 행정은 봉사이기 때문에 임기가 없는 것"이라며 "공무원은 헌법 7조만 지키면 된다. 그걸 지키기 위해서는 첫째 청와대가 행정 각 부에 줄서기 인사를 시키면 안 된다. 각 부처의 실·국장급 인사는 총리나 장관이 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헌법 7조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이다.
고 전 총리는 "내 경우는 정권에 충성한 적은 없다. 국민 전체를 위한 중도실용의 행정을 하려고 했다. 항상 중도실용의 행정을 지향했다"고 자부심을 나타냈다.
아울러 "모든 행정에는 사각지대가 있고 모든 정책에는 부작용이 있다. 바둑으로 치면 최소한 세 수를 봐야 한다. 정책의 부작용이 무엇일까. 해소책은 무엇일까. 그 해소책이 효과가 있는지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게 세 번째 수다. 그걸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고건이라는 사람이 너무 결정이 늦어진다고 그런다"고 말했다.
그는 "중앙이나 지방이나 관료들이 똑같이 범하는 실수는 평균행정을 하는 것"이라며 "실제로 평균에 해당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평균행정이 아니라 한계행정을 해야 한다. 부작용은 그 한계에서 오는 거다. 그걸 고려하는 게 한계행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내가 말해 온 '중도실용'은 전체의 평균이나 양쪽 끝의 단순한 중간이라는 뜻과 다르다. 중용에서 말하듯이 양쪽 극단을 고려해서 그 중(中)을 적용한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고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지성감민(至誠感民), 지자이렴(知者利廉), 일일신(日日新)이라는 3개 공직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특히 "야당정치인의 아들로서 청렴은 생존의 법칙이었다. 그러다 보니 청렴이 체질화됐고 나중엔 경쟁력이 됐다. 권력의 판도가 바뀌고 사정의 바람이 휘몰아칠 때도 떳떳이 내 소신대로 일할 수 있었다"고 자부했다.
회고록에서 그가 7번의 사표를 낸 일화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다. 1980년 5·17쿠데타 때는 청와대 정무수석으로서 신군부의 비상계엄령 전국확대 조치를 반대하면서 사표를 냈고,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관선 서울시장을 할 때는 한보건설 수서택지 특혜부여 지시를 거부하고 경질됐다.
noano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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