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인생 40년 정리한 책 출간…"작품 집대성한 공연 올리고 싶어"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컴퓨터 타자를 못 치니 열 달을 꼬박 노트에 연필로 써내려갔다. 기억을 끄집어내고 자료를 뒤지다 보니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가수 김수철(60)은 소리만 매만지던 사람이 활자와 씨름하느라 고충이 있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환갑을 맞은 올해 40년 음악인생을 정리한 책 '작은 거인 김수철의 음악 이야기'(까치)를 출간했다.
최근 종로구 수송동에서 만난 김수철은 "사실 히트곡과 영화 '서편제', 올림픽과 월드컵 관련 음악 등 제가 그간 만든 작품을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해 공연을 열고 싶었는데 파트너를 만나지 못했다"며 "출판사에서 제안이 와 책을 쓰다 보니 추억을 되새기고 음악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플랜을 짜고 계획대로 움직이는 성격이 못돼 그때그때 주어진 작곡에 몰두하고 매일같이 기타 연습을 하며 오늘만 열심히 살았다고 돌아봤다.
"제가 좀 둔해요. 과거보다 오늘이 중요해서 가수왕 시절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솔직히 40년 소회랄 것도 없어요. 나이 들어 '예전 같지 않다'는 소리를 안 들으려고 매번 마지막 작품처럼 최선을 다해 음악만 만들었죠. 술 먹으면 악기 연주도 어려워 20년 전에 술·담배도 끊었고 제대로 된 여행 한번 못 갔네요. 하하."
그는 인생의 3분의 2를 쏟아부은 음악의 의미를 묻자 "아직 잘 모르겠다"며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제가 알면 이러고 있겠어요. (웃음) 60대에도 작곡을 하고 있지만 음악은 어려워서 정의를 내릴 수 없어요. 죽기 전에 알면 성공한 인생이죠."
◇ 인생곡은 가요부터 만화영화 주제가까지…"방탄소년단·아이유 훌륭해"
시간에 따라 기술한 책은 기타를 독학하며 첫 자작곡 '내 인형'을 만든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광운대 통신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생 밴드 '퀘스천'을 결성해 1977년 KBS 라디오 '젊음의 찬가'에서 첫 방송을 하며 데뷔했다. 1978년 밴드 '작은거인'을 만들어 두 장의 앨범을 낸 뒤 1983년 솔로로 나섰고, 1980년부터 우리 소리를 연구하며 국악의 현대화 작업에도 매달렸다. 책은 그가 작업하고 발표한 음악 작품 순서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됐다. 음악을 넘어 교류한 인연도 깨알같이 담겼다.
그를 알린 '못다 핀 꽃 한 송이'와 '내일'이 수록된 솔로 1집이 처음부터 반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집안에선 가수는 '딴따라'라며 반대도 심했다고 한다.
"공무원이 되려고 건국대 행정대학원으로 진학했죠. 그런데 평소 알던 안성기 형의 제안으로 영화 '고래사냥'의 주인공 '병태' 역에 캐스팅됐어요. 촬영을 4개월쯤 했을 무렵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뜬 거예요. 방송에 출연하자 KBS '가요 톱 10' 5주 연속 1위를 했고 1984년에 낸 2집도 '왜 모르시나'와 '젊은 그대' 등 여러 곡이 히트했죠."
그는 '고래사냥'을 비롯해 '칠수와 만수', '서편제', '태백산맥' 등의 영화 음악도 만들었다. '노다지', '사랑이 뭐길래' 등의 드라마와 친숙한 만화영화 주제가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1990년 그가 부른 KBS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의 주제곡 '치키치키차카차카'는 초등학교 5학년 음악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김수철은 인생곡을 꼽아달라는 말에 "작은거인 시절의 '일곱색깔 무지개'로 젊은층에 다가갔다면, '못다 핀 꽃 한 송이'는 저란 존재를 알리고 돈도 벌게 해준 곡"이라며 "'서편제' 음악을 통해 제가 국악을 한다는 것을 알렸고, '치키치키차카차카'로 어린이들과도 연결됐다"고 기억했다.
이미 1990년대 인도에 건너가 시타르 등의 악기를 배우는 열정이 있던 그는 한참 후배들의 요즘 음악도 꿰고 있었다.
그는 "시상식 심사도 하고, '쇼미더머니' 같은 프로그램도 좋아해서 요즘 후배들이 어떤 음악을 하는지 알고 있다"며 "한길로 죽 가서 미국에서 훌륭한 결과를 낸 방탄소년단을 보면 기분이 좋다. 인기에 도취하지 않고 자기 음악 세계를 차곡차곡 쌓는 아이유도 칭찬하고 싶다. 또 다이나믹듀오, 비와이 등의 후배들도 좋아한다. 전반적으로 후배들의 실력이 좋아 세계 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고 칭찬했다.
◇ 37년간 국악 연구…"우리 문화 척박해 '나라도 알리자' 생각"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졌지만 김수철은 1980년부터 37년간 국악의 현대화 작업에 매달렸다. 지금껏 발표한 총 37장의 음반 중 '불림소리', '팔만대장경' 등 국악 음반이 25장에 달한다.
우리 소리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1980년 친구들과 함께 소형 영화 '탈'을 만들면서 영화 음악을 작곡한 게 계기였다. 당시 '탈'은 프랑스 세계청소년영화제에 출품해 본선에 진출했다.
"한국 젊은이의 단면을 그린 영화여서 국악을 담고 싶었어요. 중학교 음악 교과서부터 뒤졌는데 서양 음악 위주여서 우리 것에 대한 내용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산조를 수박 겉핥기로 공부해 기타로 '탈'의 음악을 작곡했죠. 그때 느꼈어요. '내가 록만 하면서 우리 소리를 너무 모르는구나'라고요. 부끄러웠고 호기심도 생겨서 그때부터 국악을 공부하기 시작했죠."
호기심에 머물지 않은 데는 국가적인 행사 음악을 작곡한 것도 동력이 됐다. 그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전야제를 시작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 전야제, 2002 한일 월드컵의 조 추첨과 개막식 음악을 작곡했다.
그는 "처음부터 애국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며 "그런 음악을 만들다 보니 서양 문화의 범람으로 우리 문화가 너무 척박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문화의 균형이 안 맞으니 '나라도 우리 것을 알리자'고 생각했고 해가 갈수록 깊어졌다"고 돌아봤다.
서울 아시안게임 음악을 만들면서는 '기타 산조'란 장르를 개척했다. 그가 이름 붙인 '기타 산조'는 전자 기타로 우리의 가락인 산조의 형식을 빌려 작곡하고 연주한 음악을 뜻한다. 그는 "우리 소리를 현대화해 세계로 나가려면 보편타당한 음악을 작곡해야 했다"며 "서양 악기인 기타를 수단으로 우리 소리가 담긴 현대 음악을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악 작업은 제작비가 많이 들면서도 대중적인 소비가 적다 보니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었다.
"가수로 한창 돈을 벌 때는 제작비가 메워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몇천만 원씩 영수증이 날라와 집이 저당 잡힌 적도 있죠. 안성기 형은 제가 어려울 때 세 번이나 돈을 빌려줬어요. 물론 부지런히 노래해 다 갚았지만 그런 도움 덕에 고비를 넘기며 새로운 것을 구상했고 또 실패하며 많은 것을 배웠죠."
그는 37년의 세월과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온리(Only) 자존심"이라며 "국악을 현대화하는 작업은 내가 효시라는 자부심과 보람이 있다. 1996년 국립국악원이 발행한 '한국음악 창작곡 작품목록집'에 제 국악 곡들이 수록됐을 때 정말 기뻤다"고 말했다.
또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됐던 '불림소리' 음반을 평생 시리즈로 내고 싶다며 앞으로도 이 길을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40년간 만든 음악을 집대성해 공연으로 올리는 것도 큰 계획이다.
"히트곡을 많이 내 빌딩을 사는 가수도 있겠죠. 전 재산은 없지만 히트곡 덕에 공부할 기회를 얻었으니 제 몫은 이거예요. 그래서 전 제 노래를 좋아해 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mi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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