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명예회복 병행돼야 마을 공동체 치유"
(서귀포=연합뉴스) 고성식 기자 = 정부가 제주해군기지 반대운동을 했던 강정마을 주민과 5개 단체에 청구했던 수십억 원의 구상권 청구를 사실상 철회하기로 하자 강정마을회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고, 공동체 회복 등의 남은 과제도 있어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강정마을회는 12일 제주군사기지저지와 평화의섬 실현을 위한 범도민대책위원회를 통해 정부가 구상권 청구 철회를 위한 법원의 조정 결정을 수용한 것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번 결정이 마을 공동체 회복과 제주도의 해군기지 사업 관련 진상조사가 제대로 추진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2007년부터 해군기지 건설이 추진될 때부터 2013년까지 7년간 반대운동을 이끌었던 강동균(60) 전 마을회장은 "마을을 위해 헌신한 일 때문에 고통을 받아왔다"라며 "여러 문제 중의 하나가 해결된 것에 대해 환영한다"고 말했다.
강정마을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 사항인 해군의 구상권 청구 소송 철회가 곧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고, 정부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법원의 조정안을 수용하기로 했다.
서울중앙지법 제14민사부는 지난달 "피고인들에 대한 소를 모두 취하하고 민형사상 청구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조정 결정을 했다.
제주도는 앞서 지난 6월 '강정마을 구상권 청구 철회 및 공동체 회복을 위한 건의문'을 도내 각 사회단체로부터 서명받아 청와대에 제출한 바 있다.
도는 건의문에서 해군의 구상권 청구소송 철회를 비롯해 처벌 대상 주민들에 대한 특별 사면, 강정마을 공동체 회복 사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등을 요청했다.
◇ 구상권 청구 VS 국가 폭력
해군은 불법적인 공사 방해 행위로 공사가 14개월여 지연돼 추가 비용 275억원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국가 세금에 손실을 준 원인 행위자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는 취지로 2015년 3월 서울중앙지법에 구상권 행사 소장을 제출했다.
공사가 지연된 기간(2011년 1월∼2012년 2월)에 사업 대상지를 무단 침입해 공사 현장을 점거하고 공사장 정문을 봉쇄하는 등의 가담 정도를 놓고 가∼라군으로 나눴다.
가군은 개인 26명·5개 단체로 이들에게는 가장 많은 액수인 총 31억4천800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지웠다. 나군 32명에게는 2억원, 다군 32명에게는 9천만원, 라군 26명에게는 1천만원을 물라고 요구했다.
구상권 청구 대상은 개인 116명(마을주민 38명)과 강정마을회 등 5개 단체다. 구상금 총액은 34억4천800만원이다.
해군은 여기에 공사 지연으로 인한 추가 손실금 362억원(대림산업 231억원, 삼성물산 추가분 131억원)에 대해서도 구상권을 청구하려고 추진한 바 있다.
강정마을 주민과 제주참여환경연대 등 사회단체들은 해군의 구상권 청구 사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고 주장해 왔다.
이 같은 구상권은 제주해군기지와 밀양 송전탑 등 국책사업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옥죄기 위한 본보기로써 청구된 하나의 국가 폭력으로 규정했다.
주민들이 총회를 거쳐 해군기지 사업 반대를 결정했고,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에 따라 의사 표시를 할 권리가 있으므로 손실금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것은 국책사업 반대에 대한 겁주기에 불과하다고 봤다.
주민 등의 변호를 맡은 백신옥 변호사는 "국민을 위한 업무에 차질이 생겼다고 해서 국민에게 재산상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가 스스로 역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주 생계수단인 농사와 어업을 내팽개치고서 마을 일에 장기간 나섰다가 오히려 거액의 구상권이 청구되자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받아왔다.
1인당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지워진 구상금은 소박한 농어촌 주민들에게는 그 액수만으로도 큰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을을 지키겠다는 신념과 선의로 했던 일들이 공권력에 의해 잘못된 행위로 규정됐다고 여겨지면서 마음마저 타들어 갔다.
마을의 한 주민은 "법원에서 갑자기 가압류가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10년 동안 싸우면서 정신적, 육체적 피해가 컸는데 재산 피해까지 보면 우리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걱정으로 잠을 설쳤다"고 말했다.
◇ 주민 명예회복, 마을 공동체 치유 필요
2007년 5월 강정마을이 처음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로 발표되자 마을 분위기는 곧바로 험악해졌다.
유치 결정 과정에 절차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일부 주민들은 주민총회를 제안했다. 그해 6월 열린 주민총회에 700여 명이 모여 높은 관심을 보였지만, 주민 일부가 기표소를 부수고 투표함을 들고 달아나는 소동이 벌어지며 총회는 무산됐다.
두 달 뒤 열린 마을총회에서는 해군기지 유치 청원서를 제출한 당시 마을회장이 해임됐다. 이어 열린 해군기지 유치 찬반 투표에서는 먼저 유치 의사를 밝혔던 주민 86명보다 훨씬 많은 680명이 반대했다.
이후 기지 건설 찬반을 놓고 마을주민이 나뉘어 끝없이 대립했다. 게다가 반대활동을 하다 경찰에 연행 구속되는 사태까지 속출해 기지를 유치한 주민은 물론, 이를 막는 주민 모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제주군사기지저지대책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기지 건설 반대 시위를 하다 연행된 마을주민과 활동가는 연인원으로 700여 명이 넘는다. 재판에 넘겨져 부과된 벌금은 현재까지 3억7천여만원(400여건)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원래 강정마을에는 외부에서 유입된 거주민이 적고 몇몇 성씨의 '?당'(제주어로 친척)으로 얽혀 있는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해마다 강정천에서 열리던 별포제는 물론 수눌음 등의 전통마저 없어졌다. 마을의례회관 부근 사거리에 마주한 시골 가게 2곳 중 한 곳은 찬성 주민만, 다른 한 곳은 반대 주민만 이용한다.
고권일 강정마을 부회장은 "기지 입지선정 과정의 절차적 정당성 결여, 막대한 규모의 공권력에 의한 연행과 구속 등으로 국가나 행정에 대한 주민의 불신과 공포가 생겨났다"며 "국가의 유감 표명, 적절한 조치와 재발방지 등의 노력으로 명예회복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강정마을의 공동체가 치유될 길이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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