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군 통역 데이비드 돌린저씨 "희생자 잊지 말고 광주 진실 밝혀야"
(광주=연합뉴스) 장아름 기자 = '우리 모두 역할이 있었고 잘못이 있었지만, 1980년 5월 운명적인 날 죽어간 이들에게 우리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64·David L. Dolinger·한국명 임대운)씨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외신기자들의 취재를 돕고 5·18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돌린저씨는 최근 5·18 트라우마센터 특별 기고를 통해 37년 전 5월 광주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미국 평화봉사단 단원 자격으로 국내에 체류했던 돌린저씨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외신기자들의 통역을 도우며 도청에서 활동했다.
그는 결혼식 참석을 마치고 5월 18일 근무지인 전남 영암으로 돌아가려고 광주 버스터미널을 찾았던 날을 회고했다.
'광주에 도착할 즈음 최루가스 냄새가 점점 강해졌고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터미널 문은 닫혀 있었다.'
광주에서 활동하던 봉사단 동료로부터 계엄군이 진압봉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구타하고 거리로 끌고 갔는지 들었을 때만 해도 귀를 의심했지만 이후 다른 곳에서 광주시민들에게 가해진 야만적인 광기를 목격했다.
돌린저씨는 '다음날 영암으로 돌아갔다가 석가탄신일인 21일 서울에 가기 위해 첫차로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가 인생의 교차점에 서게 됐다'고 밝혔다.
버스는 나주에 도착하자 더는 운행하지 않았고 광주로 향하는 모든 교통이 통제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돌아서서 영암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했을 테지만, 나는 광주에 사는 사람들이 무사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지 생각했고 뒤돌아보지 않고 광주로 향했다'고 회고했다.
광주를 떠나라는 미국 대사관과 평화봉사단의 명령을 무시한 채 돌린저씨는 매일 전남도청에 가 대책회의에 참석하고 군대가 광주를 재점령하려고 영어로 통신하는지를 밤새 모니터링했다.
그는 그 시절을 '중앙정보부 요원, 헬리콥터와 군인의 사격, 죽음, 공포, 열정, 불면의 밤과 괴로움에 직면했다'고 묘사했다.
그는 기고를 통해 '광주의 그 시간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오늘의 세대와 미래 세대를 위했던 이들의 희생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매일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광주의 진실을 위해 왜, 어디서, 무엇을 물어야 한다'며 진상 규명 필요성을 강조했다.
돌린저씨는 2008년 병마와 싸우며 "죽으면 재 일부를 동지들이 잠든 5·18 묘지에 묻어달라"고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그는 이후 건강을 회복해 2008년, 2013년 두 차례 광주를 찾았으며 5·18 당시 상황을 기록한 책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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