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란정 소방관 순직'…"소방환경 이번엔 나아질까"
소방환경 개선→안전서비스 개선→순직 감소 '선순환' 기대
소방보건의사 1명도 없는 한국…화재참사 날때만 '반짝관심'
(강릉=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영욱이 형님, 호현아. 이제는 화마가 없는 곳에서 편히 잠드소서…"
지난 9월 17일 새벽 강원 강릉 석란정에서 화재 진화 중 무너진 건물 잔해 등에 깔려 순직한 고(故) 이영욱(59) 소방경과 이호현(27) 소방교.
석 달이 지난 이달 17일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석란정을 찾았다.
현장에는 지난 화재 참사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검게 그을린 나무와 흙이 여전히 무덤처럼 높게 쌓여 있었고, 이는 마치 폐기물 무덤이 된 것 마냥 누군가가 버린 폐목재와 쓰레기들로 뒤엉켰다.
석란정을 덮고 있던 파란색 망은 이곳저곳에 눌어붙었고, 나무를 기둥 삼아 처져 있던 폴리스라인 테이프는 힘없이 끊어진 채 호수 바람에 이따금 날릴 뿐이었다.
석 달 전 석란정 한편에 놓였던 흰 국화꽃 대신 석란정 옆은 어느새 스카이베이 경포호텔이 하얀 외벽을 드러낸 채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두 사람은 9월 17일 오전 4시 29분께 강원 강릉 석란정에서 화재 진화 중 무너진 건물 잔해 등에 깔려 순직했다.
센터 내에서 가장 맏형인 이 소방경은 1988년 2월 1일 임용돼 햇수로 30년 동안 각종 재난현장을 누빈 베테랑이었다.
임용된 지 불과 8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새내기 소방관인 이 소방교는 소방관이 되고 나서도 "사고 없이 일하려면 체력관리가 중요하다"며 자기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을 정도로 직업 정신이 투철한 소방관이었다.
두 사람은 늘 한 조를 이뤄 근무했다. 지난 1월에는 20세기 한국 최고 전통가옥으로 선정된 중요민속문화재 강릉 '선교장'을 화마로부터 지켜냈다.
5월 강릉 산불 때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화마로부터 주민과 가옥 보호는 물론 주요시설 보호에도 큰 몫을 다한 '진정한 소방맨'이었다.
하루아침에 믿음직한 선배이자 든든한 가장이었던 이 소방경과 매사 적극적인 후배이자 힘든 내색 없이 착하게 자란 아들이었던 이 소방교를 잃은 가족과 동료들은 두 사람을 가슴에 묻었다.
"석란정 내부에서 불이 나 불길이 확산했지만, 화재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30년 베테랑과 새내기 소방관의 목숨을 앗아간 그 날 참사의 도화선이 된 화재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화재원인은 미스터리로 남았으나 국민 모두는 알고 있었다. 두 소방관의 순직사고 이면에는 크고 작은 재난현장에서 엄청난 연기를 마시고, 밤을 새우고, 때로는 끼니도 거르며 일해야 하는 열악한 근무환경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국민 생명과 신체,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불길 속에 거침없이 뛰어들었다는 것을 말이다.
"목숨을 걸고 국민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소방관 처우를 서둘러 개선해야 합니다.", "사명감으로 일하는 소방관들 근무환경이 개선돼야 합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소방관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또다시 높아졌다.
평균 수명 67세, 3명 중 1명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 1인당 평균 6.36건 트라우마 경험, 소방보건의 0명, 소방관 전문 치료병원 전무, 최근 10년 새 순직한 소방관 수 51명…. 대한민국 소방관의 자화상이다.
열악한 근무환경을 보여주는 지표는 차고 넘쳤다. 석란정 참사 이전부터 소방관들은 하얀 분말을 뒤집어쓰며 눈물을 닦아달라고 호소했다. '죽어야 관심받는다'는 자조 섞인 탄식까지 터져 나왔다.
무엇보다 법정 필요인력조차 채우지 못해 인력 충원이 절실했다. 인력부족은 현장대원들을 고된 업무와 위험에 처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올해 하반기 1천500명 채용을 비롯해 2022년까지 소방 현장인력 2만명을 확보하기로 했다.
2019년 1월부터는 지방직인 소방공무원을 국가직으로 일괄 전환하기로 했다. 현재 소방공무원은 98.8%가 지방직이고 1.2%만이 국가직이다.
지방직 소방공무원은 각 지방자치단체 재정에 따라 인력, 소방장비 등 근무조건 차이가 크다. 소방관이 사비를 털어 안전 장갑을 사야 하는 말도 안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오랜 염원이었던 소방관 전문 치료병원도 이르면 2021년 충청권에 문을 연다. 현재 화재 현장 등에서 부상한 소방관들은 서울 송파구 국립경찰병원을 포함해 전국 각지 병원과 연계된 69개 지역 소방전문치료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이 가운데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은 경찰병원 한곳뿐이다. 나머지는 말이 좋아 소방전문치료센터이지 병원마다 혜택이 달라 소방관 자부담이 만만치 않다.
소방공무원 보건안전 및 복지기본법에 따라 시·도 소방본부가 두도록 한 법정 소방보건의는 전국에 단 한 명도 없다는 점과 순직사고 원인 분석 등 소방 관련 연구 기능을 담당할 연구소 설립도 해결해야 할 문제다.
소방청은 이 같은 내용을 종합한 '순직사고 저감 종합대책'을 이달 중으로 발표하고 전국적으로 시행에 들어갈 방침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방관들은 목숨을 걸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재난현장에서 소방관 안전까지 완벽히 지킨다는 게 힘들다는 건 소방관들도 잘 알고 있다.
다만 근무환경이 개선되고, 소방관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 제도와 기관 등이 마련됐을 때 순직사고가 줄어들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곧 국민에게도 더 나은 안전서비스로 돌아올 것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도 충분하다.
순직한 이호현 소방교의 스승인 황재호 강원도립대 소방환경방재학과 교수는 "영화 슈퍼맨처럼 현실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사람이 소방관이다. 언제나 목숨 걸고 일하는 소방관들을 모든 국민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conany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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