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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한현민(16)은 국내 최초의 흑인 혼혈 패션모델이다. 이제 고등학교(서울 강서구 화곡동 한광고) 1학년인 데뷔 2년차 신인인데도 지난 10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국내 최대 패션쇼 서울패션위크에서 20여 개 브랜드 무대에 섰을 정도로 톱 모델로 떠올랐고,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전 세계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 30인' 명단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단편영화와 CF에도 출연하는가 하면 이달부터는 tvN 예능 프로그램 '나의 영어 사춘기'에도 등장하며 폭넓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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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민은 나이지리아 출신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5남매 맏이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태어났다. 189㎝ 65㎏의 훤칠한 몸매에다가 까무잡잡한 피부와 뚜렷한 얼굴 윤곽을 지녔다. 지금은 이국적이고 개성 넘치는 외모라고 호평받지만 어릴 때부터 놀림을 많이 받았다. 길을 나서기만 해도 신기한 듯 쳐다보는 시선이 쏟아졌고, 친구와 친해질 만하면 "어머니가 너와 놀지 말래"라는 말과 함께 멀어지는 일이 거듭됐다. 집안도 넉넉지 않아 야구선수가 되고 싶은 꿈도 접었다. 중학교 들어가기 직전에 키가 훌쩍 크다 보니 막연하게 모델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모델이 된 학교 선배를 보고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모델 세계에서도 흑백 인종차별이 심했고 조건이 열악해 시급도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번은 프로필 사진 촬영비만 내면 해외 오디션을 보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돈을 날렸다. 남은 건 사진 몇 장뿐이었는데 이를 SNS에 올렸더니 지금의 소속사인 SF엔터테인먼트 대표에게서 연락이 와 계약했다. 지난해 3월 한상혁 디자이너의 '2016 F/W 시즌 에이치에스에치(heich es heich) 쇼' 오프닝 무대를 꾸미며 신고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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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가운데서도 그를 버티게 해준 것은 틈날 때마다 어머니가 들려준 "넌 특별한 존재란다. 꼭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는 말이었다. 다른 하나는 합창이었다. 한국다문화센터가 운영하는 레인보우합창단에 들어가니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가 수두룩해 위안을 얻었다. 또래 친구들과 화음을 맞춰 노래하다 보면 시름과 걱정도 사라졌다. 2011년 8월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제66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는 필리핀 다문화 자녀 김은아 양과 함께 애국가를 선창하기도 했다.
지난 9월 21일 강원도 원주에서 열린 제11회 전국다문화가족네트워크대회 개회식에서 한현민은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으로부터 '다문화 인식개선 홍보대사' 위촉장을 받았다. 10월 20일 경복궁에서 열린 한복의 날에는 한복 홍보대사로도 위촉됐다. 그는 학교에 다니랴 모델 일을 하랴 바쁜 가운데서도 봉사활동에 열심이다. 지난 2일 이상봉 자선 패션쇼에서 다문화 어린이들에게 모델 워킹과 포즈를 가르쳤는가 하면 16일에는 JTS 빈곤퇴치 거리모금 캠페인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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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유진(15)은 서울 강서구 등촌동 등원중 3학년에 다닌다. 현민과 함께 레인보우합창단에서 노래했고 패션모델로 데뷔했으며 그를 따라 한광고에 진학할 예정이다. 175㎝ 49㎏의 늘씬한 몸매와 긴 팔다리,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 등 여러모로 현민과 공통점이 많지만 가정환경만 따지면 훨씬 어렵게 자랐다. 무남독녀인 데다 비혼모인 어머니가 그리스에서 그를 낳은 뒤 한국에서 홀로 키웠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이지리아계 미국인으로 알려졌다.
유진은 한국계 흑인 혼혈의 롤모델인 미식축구 스타 하인스 워드가 2006년 4월 방한했을 때 펄벅재단 주선으로 그를 만나 도움을 받아왔다. 지난 7월 한국을 찾았을 때도 11년 만에 재회했다. 어린이집을 다닐 때부터 숱하게 놀림을 받아도 집에 와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슬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친구가 '아프리카 깜둥이'라고 놀렸는데, 아파트 베란다에 있던 어머니가 그 말을 들었다. 어머니와 끌어안고 펑펑 운 뒤 다시는 울지 않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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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노래를 좋아했고 어머니도 성당에서 성가대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광복절에 현민이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을 TV로 보고 레인보우합창단에 들어가기로 했다. 오디션을 거쳐 입단한 뒤 처음 배운 노래가 그룹 아바의 '아이 해브 어 드림'(I have a dream)이었다.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명연설 제목이기도 한 이 노래를 부르며 유진도 힘을 얻고 꿈을 키워갔다.
모델로 나선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지난 6월 친구가 잡지 사진을 찍는다고 해 구경 삼아 따라갔다가 사진기자의 권유로 유진도 포즈를 취했고 패션잡지 '얼루어'(ALLURE)에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모델에이전시에서 제의가 와 넉 달 훈련한 뒤 현민과 함께 서울패션위크 런웨이에 섰다. 데뷔 무대에서 이례적으로 9차례나 캣워크를 선보였다.
이제는 꿈도 성악가나 가수에서 모델로 바꿨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기도 했고,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해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이다. 남과 다른 내 외모가 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남과 같아지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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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혼혈들은 백인 혼혈이나 아시아계 다문화가정 자녀에 비해 훨씬 심한 차별과 냉대를 받아왔다. '깜둥이'라고 놀림받는 건 보통이고 '연탄'이니 '식인종'이니 하는 험한 말도 들어야 했다. 보통 흑인이 백인보다 못살다 보니 아버지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아 경제적인 고통도 더 크다.
가요계에서는 박일준·인순이·윤미래·소냐 등 흑인 혼혈 가수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그동안 모델 분야에서는 혼혈도 다니엘 헤니·데니스 오·김 디에나·이유진 등 백인계 일색이었다. 한현민과 배유진이 등장이 우리 사회의 포용력이 커진 징후로 느껴져 반갑다. 한동안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다가 고니가 된 이들의 힘찬 비상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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