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9년 만의 사면·복권 '용산참사'는 어떤 사건

입력 2017-12-29 11:11  

약 9년 만의 사면·복권 '용산참사'는 어떤 사건
2009년 1월20일 용산 남일당 진압작전 중 철거민 5명·경찰 1명 사망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 특별사면에 관련자 25명이 포함된 용산참사는 서울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세입자와 땅 주인 간 갈등이 사망자 6명을 낳는 대형 사고로 번진 대표적인 사건이다.
2008년 말부터 추진해온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일대 용산4구역 재개발 사업을 위해 상가 철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입자들이 2009년 1월 19일 오전 남일당 빌딩이라는 4층짜리 상가 옥상에서 농성을 시작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철거민이 된 세입자들은 재개발 조합이 지급하는 보상비·이전비로는 생계가 곤란하다며 추가 보상을 요구하며 농성했고, 철거민 단체인 전국철거민연합회도 이에 가담했다.
이들은 옥상에 망루를 짓고 철거 용역과 경찰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고 새총으로 구슬 등을 쏘며 저항했다. 경찰은 건물을 봉쇄하고 물대포를 동원해 철거민들의 농성을 저지하려 했다.
경찰은 이튿날 아침부터 경찰특공대를 태운 컨테이너를 건물 옥상으로 올려보내 진압을 시도했고 철거민들은 이에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망루에 난 화재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숨졌다.
참사의 원인을 두고 철거민들의 화염병·시너 등이 문제였다는 주장과 경찰의 과잉진압이 문제였다는 주장이 맞섰다.
검찰은 참사 이후 관련자들을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기소했고, 법원에서 유죄가 인정돼 실형 또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용산참사는 이후 도심 시위에도 영향을 줬다. 시민단체는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를 꾸려 도심에서 '여기 사람이 있다'는 구호를 내세운 추모행사 등 시위를 벌였다. 이를 주도한 대표자들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가 인정돼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후 용산참사는 세입자와 지주 간 다툼이 사고로 이어질 때마다 '제2의 용산참사'라는 명칭을 붙일 정도로 대표적인 사건으로 각인됐다.
철거민들이 과잉진압 책임자로 지목한 김석기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은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경북 경주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참사 현장인 한강로2가 일대에는 대규모 주상복합 아파트가 건설 중이며, 2020년 입주 예정이다.
정부는 용산참사 관련자들을 사면한 이유에 대해 "사회적 갈등 치유와 국민통합 차원에서 공안사건 중 대표적 사건인 용산 사건 철거민들의 법률상 자격 제한을 해소하는 사면·복권을 실시했다"고 설명했다.
comm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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