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명문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절터
(보령=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숭엄산(嵩嚴山)이라 불리던 충남 보령 성주산(聖住寺·667m) 자락에 터를 잡은 성주사지(聖住寺址·사적 307호)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백제 29대 법왕이 전쟁에서 죽음에 이른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오합사'(烏合寺)라는 호국사찰을 세웠고, 백제 멸망 직전 적마(赤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이 절을 돌아다니면서 백제의 멸망을 예시했다고 전한다.
헌덕왕 14년(822) 신라의 웅천주(熊川州:지금의 공주) 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난 등 대규모 전란으로 폐허가 됐고, 신라 문성왕 7년(845) 당나라에서 선종(禪宗)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무염(無染, 800∼888) 대사가 이곳에 성주사(聖住寺)를 창건했다.
통일신라 말기 왕실과 진골 세력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발전한 교종이 점차 그 힘을 잃어가고,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이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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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가 성주산문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다. 번창하였을 때는 2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도하던 선종 불교의 중심지였고 절에서 쌀 씻은 물이 성주천을 따라 십 리나 흘렀다고 한다. 당시 성주사를 모르면 '일세의 수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창했다. 심광·대통·여엄·자인 등으로 이어지는 성주산문의 문도들은 지방호족, 왕건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고려 시대에도 대가람으로 번성할 수 있었다. 성주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 중반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8년 동국대학교박물관의 조사를 시작으로 2011년까지 13차례에 걸친 학술조사 끝에 건물의 초석, 백제와 통일신라 때의 수막새, 명문이 새겨진 조선 시대의 암막새, 흙으로 빚은 소조상(塑造像) 파편 등 백제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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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5천㎡ 규모의 성주사지에서 가장 도드라진 유적은 국보 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光塔碑)다. 신라 최고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崔致遠)이 진성여왕의 명에 따라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해 쓴 비문으로, 신라 석비 중 가장 크다.
거북 받침돌 위에 세워진 높이 4.55m의 비석에는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진골이던 무염대사의 성장과 출가, 중국에 유학하여 공부하는 과정, 귀국하여 성주사를 일으키고 불법을 전하는 과정, 골품제, 통일신라 시대 사회상 등이 5천120자에 낱낱이 기록돼 신라 신분제도와 사회상, 고어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 해체·보수했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다.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 무늬가 새겨져 있고, 꼬리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표현돼 흥미를 자아낸다.
이종주 문화관광해설사는 "비문이 1천여 년 풍상을 견디며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이는 성주산 일대에서 채취되는 남포오석으로 비신(碑身)을 세웠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최치원이 쓴 사산비문(四山碑文) 중 하나로 최치원의 명문장과 완벽한 보존상태, 뛰어난 조각술 그리고 웅장한 크기 등이 어우러져 통일신라 말기의 우리나라 고승 탑비 중에서 최고의 비로 인정받고 있다"고 말한다.
사산비문의 나머지는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부도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부도비, 경주 초월산의 대숭복사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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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산선문 중 가장 번창했던 절집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의 성주사지에 도착하면 산골에 자리한 적막한 절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주사는 통일신라 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사찰로 중문-석등-오층석탑-금당의 불대좌-강당으로 이어지는 '1탑 1금당' 가람배치 구조다. 오른쪽은 삼천불전지, 왼쪽은 다른 불전지의 평면 구성을 택했다. 지금은 제대로 된 건물 하나 남아 있지 않고 석탑과 절터의 흔적만이 성주사의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생채기 난 돌탑 위에 쌓인 하얀 눈과 따스한 햇살 때문인지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 감도는 폐사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석등(도 유형문화재 제33호)과 오층석탑(보물 제19호)이 반긴다. 지붕돌에 비해 등불을 두는 화사석(火舍石)과 받침기둥은 가는 모습이다. 상륜부가 파손된 석등 뒤편으로는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비슷한 오층석탑이 서 있다.
상륜부를 잃어버린 이 석탑은 석가탑·다보탑 등 신라의 탑이 대체로 3층인 것과 다르게 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이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져 우아함이 가득하고, 기단부와 1층 몸돌 사이에 괴임돌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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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층석탑 뒤편으로 절터의 흔적이 복원돼 있다. 금당 터에 오르는 돌계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의 소맷돌에는 사자상이 조각돼 있었는데 1986년 도난당했다. 현재 사자상은 복원한 것으로 안내판의 옛 사진을 통해 그 조각법을 감상할 수 있다. 5단으로 쌓은 계단을 경건한 마음으로 오르면 금당의 불대좌가 눈길을 잡아둔다. 텅 빈 공간에서 잠시 눈을 감고 천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면 금당의 본존불과 그 주위를 돌며 기도하던 승려와 민초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금당 터 뒤로 서삼층석탑(보물 제47호), 중앙삼층석탑(보물 제20호), 동삼층석탑(도 유형문화재 제26호) 등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다. '1탑 1금당' 가람배치에서 벗어난 이유는 성주사의 탑이 아니라 후대에 다른 곳에서 옮겨져 왔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인연으로 이곳에 모셔졌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상상력을 자극하는 금당을 호위하듯 서 있다.
3기의 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서삼층석탑은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든다. 이 탑은 지붕돌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불교행사 때 금동판이나 기타 장식품 등을 매달아 탑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세 탑 모두 1층 몸돌에는 문 그림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한 쌍의 고리모형을 도드라지게 조각했는데, 탑이 사리를 모시고 있음을 의미한다.
1971년 해체·수리 당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이 발견됐다. 탑의 머리 장식이 남아 있지 않은 중앙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날카로운 윤곽의 지붕돌이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지만 각 층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어 안정감을 지닌다.
동삼층석탑도 다른 두 탑처럼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다. '성주사 사적기'에 따르면 정광·가섭·약사여래 사리탑 중의 하나다. 중앙삼층탑과 서삼층석탑이 보물로 지정된 것과 달리 동서삼층탑은 보물이 되지 못했다. 문화관광해설사도 무슨 연유로 보물로 지정받지 못했는지 모른다고 하니 궁금증만 커진다.
동삼층석탑 오른편으로는 삼천불전지가 있고 뒤편으로는 투박한 느낌의 석불 입상(도 문화재자료 제373호) 하나가 서 있다. 얼굴 형태를 알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석불은 귀가 깨지고, 코도 시멘트로 보수해 전체적인 인상이 일그러졌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시대 사이에 만들어진 민불(民佛)로 짐작된다. 성주사지는 1천여 칸 규모의 웅장했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지만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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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 서해 해군사령부 '충청수영성'
성주사지에서 차로 30여 분, 25㎞ 떨어진 곳에는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이 있다. 조선 시대 서해 해군사령부였던 충청수영성은 대흥산 상사봉(215.9m)에서 북서쪽으로 달리는 능선 말단부에 축조된 석축산성으로, 북·동·남벽과 서벽 일부는 자연능선을 활용해 쌓았다. 서벽부의 370m 성벽은 바다에 면해 오천항과 천수만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천항은 백제 때부터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 회이포(回伊浦)로 불렸다. 고려 시대 이후 남부 평야 지대의 곡식을 개성이나 한양으로 운반하는 조운선이 지나는 길목으로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세조 12년(1466)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병영(兵營)인 수영(水營)을 설치했고, 중종 5년(1510) 수군절도사 이장생이 돌로 성을 쌓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충청수영의 규모는 군선(軍船) 142척, 수군(水軍) 8천414명에 이른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됐다.
곽정희 문화관광해설사는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에서 내륙으로 10여 리 들어간 지점에 있어 적으로부터 은폐되어 있을 뿐 아니라 조류의 속도가 매우 빨라 외적이 접근하기 어렵고, 천수만 입구가 안면도를 비롯한 많은 섬과 암초들로 막혀 있어 강한 바람에도 파도가 일지 않고 수심이 깊어 어떠한 기후조건에서도 군선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요충지"라며 "경상·전라좌우영에 비해 성곽 원형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라고 말한다.
충청수영성의 성문은 진남문·만경문·망화문·한사문 등 4곳에 있었으나 서문인 홍예문 형태의 망화문(望華門)만 남아 있다. 폭 3m, 높이 4m의 홍예문을 지나 성곽을 따라 걸으면 오천항이 한눈에 들어오고, 왼쪽에 빈민을 구휼하던 진휼청(賑恤廳·도 문화재자료 제412호)이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팔렸다가 1994년 재매입했다는 진휼청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온돌방·툇마루·부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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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을 재촉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깎아내린 듯한 절벽 위에 지어진 영보정(永保亭)에 오르면 한눈에 주변 풍광을 조망할 수 있다. 많은 시인 묵객들이 영보정을 찾아와 주변 풍광을 즐기며 시와 노래로 읊었다. 다산 정약용은 "세상에서 호수·바위·정자·누각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보정을 으뜸으로 꼽는다"며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했다. 연산군 11년(1504) 충청수사 이량이 처음 짓고 수차례 중·개수를 거쳐 고종 15년(1878) 화재로 터만 남아 있었는데 2015년 137년 만에 복원됐다.
영보정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건너면 수군절도사의 집무실이었던 공해관(拱海館)의 출입문인 삼문(三門·도 유형문화재 제210호)이 우뚝 솟아 있다. 공해관 건물은 사라지고 오천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삼문만 이곳으로 옮겨졌다. 삼문 앞에는 충청도 관찰사와 수군절도사들의 공덕비들이 도열해 있다.
삼문 뒤에는 수영의 간부들이 회의하던 장교청(將校廳·도 문화재자료 제411호)이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다.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는데, 객사의 이름은 운주헌(運籌軒)이다. 1986년까지 오천면 사무소로 사용된 장교청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평면에 오른쪽 끝 한 칸에는 온돌방을 두었고 나머지 세 칸은 넓은 대청으로 마루를 깔았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중앙의 관리가 내려와 머무는 객사(客舍) 82칸, 상서헌(上西軒) 9칸, 내동헌(內東軒) 10칸, 외동헌(外東軒) 10칸, 아사(衙舍) 5칸, 군사(軍舍) 7칸 등 많은 건물 이름과 칸 수가 기록돼 있다. 지금은 진휼청, 삼문, 장교청만 전해지고 있다.
상사봉에 조성된 '충청수영성 해양경관 전망대'에 올라서면 충청수영성이 천혜의 해군 요새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충청수영성과 영보정, 오천항, 원산도와 안면도, 천수만 등 서해로 펼쳐진 시원한 풍경이 인상적이다. 해 질 녘 천수만 풍광은 명품 낙조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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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2월호 '문화유산'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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