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의 해가 밝았다. 한 달 뒤면 강원도 평창군 올림픽플라자에서 17일간 성화가 불타오르는 가운데 전 세계인의 이목이 한국에 집중된다. 올해는 1988년 서울하계올림픽이 열린 지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고, 대한민국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 참가한 1948년 제5회 스위스 장크트모리츠(생모리츠)동계올림픽과 제14회 영국 런던하계올림픽 70주년이기도 하다(1992년까지 동계와 하계올림픽이 같은 해에 열리다가 1994년부터 2년마다 번갈아 열리고 있다).
1945년 광복을 맞은 우리나라는 미국 군정 하의 혼란 속에서도 '코리아'라는 이름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1948년 1월 생모리츠 대회에 스피드 스케이팅 종목의 이효창·문동성·이종국 선수와 이한호 단장 등 6명을 파견했다. 28개국 60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는 동·하계 통틀어 2차대전으로 1940년과 1944년 올림픽이 잇따라 무산된 지 12년 만에 치러진 것이었다. 1월 30일 개막식에서 한국 선수단은 'COREE'라고 적힌 피켓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당당히 입장했다. 최용진 감독은 그때의 감격을 "백의민족 대망의 태극기 입장, 아 삼천리강산, 무궁화동산, 해외에서 민족정신 폭발의 날, 제5회 동계올림픽 대회에서 유사 이래 처음 참가하야 보무당당히 행진하였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기대주인 이효창 선수가 배탈이 나고, 문동성 선수가 부상하는 불운까지 겹쳐 메달권에는 들지 못했다.
한국 대표 선수가 올림픽 메달을 따내 시상식장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휘날리게 한 것은 1948년 7월 29일∼8월 14일 열린 런던 대회에서였다. 그때도 한국은 정부 수립 전이어서 대표단 페넌트(삼각기)에는 '조선올림픽대표단'이라고 쓰여 있었다. 런던올림픽에는 59개국에서 4천여 명의 선수단이 출전했다. 전범국인 독일·이탈리아·일본은 초청받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어려운 경제 여건에도 불구하고 축구·복싱·역도·육상·레슬링·사이클·남자농구 7개 종목 50명의 선수와 17명의 임원을 파견했다. 참가 비용을 마련하고자 100원짜리 복권(올림픽후원권) 140만 장을 처음 발행했으며 재일동포들도 후원금을 모아 기탁했다. 동계 때와 달리 국민의 응원 열기도 뜨거웠다. 선수단은 6월 21일 종로2가 서울YMCA 앞에서 서울역까지 가두행진한 뒤 장도에 올랐다.
대회 중반을 지날 때까지 메달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홍일점인 박봉식이 투원반에서 하위권 성적을 기록했고 남자농구는 8위에 그쳤다. 레슬링도 이틀째 경기에서 4체급 모두 패했고 축구는 멕시코에 5-3으로 첫 승을 거뒀으나 2회전에서 스웨덴에 12-0으로 대패해 탈락했다. 기대했던 마라톤마저 입상권에 들지 못했다. 8월 10일 첫 메달의 낭보가 날아들었다. 주인공은 훗날 한국 올림픽의 산증인으로 꼽힌 김성집이었다. 그는 역도에서 동메달을 따내 한국 대표팀 올림픽 메달리스트 1호로 기록됐다. 이틀 뒤 복싱 플라이급의 한수안도 동메달을 차지해 두 번째로 태극기를 게양시켰다. 메달 순위로 따져 한국은 59개국 가운데 32위에 랭크됐다.
그로부터 40년 후 한국은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했다.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국가로는 일본 다음이었다. 런던 이후 한국 선수단이 역대 올림픽에서 빛나는 성적을 거두긴 했어도 올림픽 개최는 대회 출전이나 입상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1981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일본 나고야를 누르고 올림픽을 유치한 것 자체가 이변이자 기적이었다. 그 뒤로도 여러 변수가 많아 대회 개최 여부가 불투명했다. 한국을 '분단'이나 '반정부 시위' 등으로만 기억하는 대다수 외국인은 끝까지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고, 국민 스스로도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나라 안팎의 우려는 기우였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 때는 아프리카 26개국, 1980년 모스크바 때는 서방 67개국, 1984년 LA 때는 공산권 11개국이 집단 불참했으나 서울올림픽에는 160개국 1만3천6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해 최대의 성황을 이뤘다. 일부 판정 시비와 육상 100m에 출전한 벤 존슨의 약물 복용 파문을 제외하면 진행도 깔끔했고 기록도 풍성했다. 한 외국 언론은 "독일인의 정확성, 미국인의 기업가 정신, 일본인의 친절이 합쳐진 행사"라고 호평했다. 현대화된 서울의 모습과 당당한 한국인의 표정도 각국 취재진의 카메라에 담겨 소개돼 세계인들이 한국을 다시 보게 됐다. 광복 후 우리와 단절된 채 살아가던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의 동포들도 TV에 비친 또 다른 조국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화려하고 깨끗한 서울을 보여주려는 과정에서 빚어진 그늘도 없지 않았다. 노점상을 없애고 걸인·노숙자들을 쫓아내는가 하면 변두리의 판자촌도 철거했다. 개고기(보신탕) 식당들도 수난을 겪었다.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라며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래도 개최 날짜가 다가오자 국민 대부분은 올림픽을 성공시키기 위해 하나로 뭉쳤다. 1년 전 6월항쟁을 통해 국민의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민주화를 이뤄낸 자부심도 한몫했다. 재외동포들도 모국을 돕고자 정성을 보탰다. 특히 재일동포들은 500억 원이 넘는 성금을 모았고 이 돈으로 올림픽공원 체조·수영·테니스경기장, 미사리 조정경기장, 올림픽회관, 전국 명승지의 수세식 화장실 등을 지었다.
평창동계올림픽은 우리나라를 또 한 번 도약시키는 역사적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30년 전 경험도 없고 시스템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올림픽의 기적을 일궈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IT산업을 선도하는 경제대국이자 한류로 전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키는 문화강국 대한민국이 못해낼 까닭이 없다. 특히 6월항쟁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지 1년 만에 서울올림픽을 맞은 한국인이 그랬듯이 촛불항쟁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낸 지금의 한국인도 자부심과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 30년 전처럼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다면 이번 평창올림픽은 역대 어느 대회보다 성공적으로 치러낼 수 있을 것이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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