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과 내기·평범한 이웃 사건 등 '사람·세상' 뒷얘기 풀어내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술자리에서 흥이 오른 한 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와 지방검찰청 차장검사가 내기를 했다. 각자 '후배'들을 호출해 어느 쪽이 더 많이 오는지를 겨루기로 했다.
야근 중이던 한 검사가 차장검사의 전화를 받고 각 부의 '말석' 검사들에게 호출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한 막내 검사는 회합 장소로 가지 않고 야근을 계속했다. 지검장 바로 밑의 '2인자'인 차장의 부름 대신 업무를 택한 것이다. 엄격한 서열과 '검사동일체' 원칙이 지배하던 과거 검찰 분위기로 보면 쉽지 않은 선택이다.
다음날 검찰청에 '비상'이 걸렸다. 차장검사가 내기에 진 것이다. 차장은 휘하 부장들을 불러 단합심을 주제로 일장 연설을 했고, 부장들은 휘하 평검사들을 불러 차장의 뜻을 전했다.
검사들의 관심은 내기에 진 것보다 차장검사의 전화를 받고도 야근을 선택한 검사에게 쏠렸다. 하지만 정작 일 처리에 골몰했던 검사는 부장의 물음에 "제가 술 마시다 차장님 불러도 차장님이 나와 주나요?"라고 반문했다.
거창한 정의를 내세운 영화 속 검사의 삶 대신 매일 주어지는 업무를 처리해 나가는 데 충실한 '생활형 검사'의 소소한 일상을 엮은 책이 나왔다. 인천지검 공안부장으로 일하는 김웅(48·사법연수원 29기) 부장검사가 쓴 '검사내전'이다.
제목은 최근 히트한 영화 '검사외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지었다. '현직 검사가 얘기하는 검찰 이야기'라는 의미를 담은 책은 19일 시중에 발간될 예정이다.
김 부장검사는 11일 "하루하루 시골노인이나 청소부처럼 생활로서 검사 일을 하는 검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책을 쓴 배경을 소개했다. 보통 직장인처럼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실천하는 검사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책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거악 척결'에 나선 정의로운 존재로 묘사되거나 혹은 정반대 편에서 '정치 검사' 내지 '출세 가도'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는 인물이 아닌 평범한 검사의 일화가 담겼다.
차장검사의 전화를 받고도 야근을 이어간 검사는 김 부장 자신이다. 이후 소위 '또라이'로 불리게 된 그는 자신을 '생활형 검사'라고 고백한다.
김 부장검사는 생활형 검사야말로 검찰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이라고 믿는다.
그는 "검사를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여객선의 철판에 고정된 나사못에 비교한 선배가 있었다"며 "요구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선배를 보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존경'이라는 감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가끔 '욱'하거나 '지시'를 따르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도 18년 동안 탈 없이 일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김 부장검사는 "유연한 검찰 문화 덕분"이었다고 웃어넘겼다.
김 부장검사는 생활형 검사의 소소한 일상뿐만 아니라 수사 도중 만난 다양한 인물을 통해 깨달은 삶과 욕망, 법과 정의 등 '사람 공부, 세상 공부' 내용을 솔직한 문체로 엮어냈다.
할머니 사기꾼에 속아 전 재산을 날린 식당 아주머니 사건을 통해선 '생가지보다 마른 가지를 먼저 꺾는' 세상 이치를 깨달았다고 그는 소개했다.
수사 과정의 생생한 묘사를 통해 '법대로 하자'는 말이 얼마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도발일 수 있는지를 깨닫는 과정도 담담히 풀어냈다.
김 부장검사는 2000년 임관해 서울중앙지검, 법무부 법무심의관실 등을 거쳐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 장관 법무보좌관으로 1년간 일하며 검찰 밖 업무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후 서울남부지검, 서울중앙지검 부부장에 이어 광주지검 해남지청장과 법무연수원 대외연수과장을 지냈고 현재 인천지검 공안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hy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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