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은 '조선여성의 첫 세계일주'에서 무엇을 보았나

입력 2018-01-23 14:38   수정 2018-01-23 17:35

나혜석은 '조선여성의 첫 세계일주'에서 무엇을 보았나
1927~1929 세계 일주기 담은 책 발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여성 도착하다' 전에는 눈길을 끄는 초상 하나가 있다.
어두운 배경에 가라앉은 눈빛을 한 초상의 주인공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꼽히는 나혜석(1896~1948)이다. 전반적으로 우울한 기운이 감돌지만 "강한 의지와 신념을 드러내는 표정과 자세에서 작가적 개성과 정체성의 발현"(강승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을 읽어낼 수 있다.
'자화상'은 나혜석이 1928년 프랑스 파리를 여행할 당시 작품으로 추정된다.
나혜석은 1927년 6월 부산에서 출발해 1929년 3월 부산에 다시 도착하기까지 1년 9개월간 각국을 돌았다. 조선 여성으로서는 첫 세계 일주였다. 시대를 앞서간 여성 예술가를 한낱 스캔들의 주인공에 가둔 최린과의 염문도 이 일주에서 시작됐다.
출판사 가갸날에서 펴낸 '조선여성 첫 세계일주기'는 나혜석이 여러 해에 걸쳐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발표한 여행기를 온전히 묶어낸 책이다. '삼천리' 기고문을 중심으로 하되 다른 매체의 글들을 찾아 보태고 순서대로 배열했다.
나혜석이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유럽 각지와 미국을 돌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생생히 전달된다.
여행기인 만큼 이국 풍경과 문물이 주는 감동과 깨달음이 주다.
그는 스위스를 둘러 보며 "누구든지 숙소를 정하지 말고 바랑 하나 짊어지고 나서도 좋다"며 감탄한다. 독일에서 관현악 합주를 감상하고서는 "마음은 서늘해지고 몸은 중천으로 떠오르는 느낌"이라고 전한다.
그렇다고 경탄만 늘어놓지는 않았다. 프랑스 파리를 두고 "공기에 자유, 평등, 박애가 충만해 있다"고 하다가도, "파리에서 한 발만 나가면 빈약하고 살풍경하니 건전한 문명, 건전한 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나혜석은 요즘 여행객들도 섭렵하기 어려운 거장들의 작품을 부지런히 둘러보면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도 되새김질한다.
책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한 흔적들이다.
그는 가사에서 자유로운 중국 하얼빈 여성들을 바라보면서 "여름이면 다림질, 겨울이면 다듬이질로 일생을 허비하는 조선 여성이 불쌍하다"고 개탄한다. "여성의 생활에 여유가 없는 사회에 오락기관이 번영할 수는 없다"고도 일침을 놓는다.
그는 영국 런던에서는 여성참정권운동가들이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부르짖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는다. 나혜석이 이때 "내가 훗날 조선 여권운동의 시조가 될지 압니까"라고 말한 대목도 예사롭지 않다.
이러한 생각들이 쌓여 훗날 "여성은 위대한 것이요, 행복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모든 물정이 여성의 지배하에 있는 것을 보았고 알았다"(1932년 '삼천리')는 선언에까지 이르게 된다.
가갸날 편집부는 나혜석 여행기를 두고 "근대적 개인으로 탈각해가는 신여성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책 마지막에는 나혜석이 1935년 2월 '삼천리'에 발표한 글 '신생활에 들면서' 일부가 실렸다. 세계 일주를 마치고 6년 후, 이혼한 지 5년 후 쓴 글이다.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중략) 4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232쪽. 1만2천800원.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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