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정현(22)이 한국 스포츠 역사를 새로 썼다. 정현은 24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남자단식 8강전에서 미국의 테니스 샌드그렌(세계랭킹 97위)을 3-0으로 완파하고 한국 선수 최초로 테니스 메이저 대회 4강에 진출했다. 한국 선수가 메이저 대회 8강 이상의 성적을 거둔 것은 남녀 통틀어 정현이 처음이다. 총상금 5천500만 호주달러(약 463억 원), 우승상금 400만 호주달러(약 34억3천만 원)이 걸린 호주오픈에서 세계랭킹 58위인 정현은 4강 진출로 벌써 88만 호주달러(약 7억5천만 원)의 상금을 확보했다. 1905년 출범한 호주오픈에서 남자단식 4강에 오른 아시아 선수는 1932년 일본의 사토 지로 이후 86년 만이다. 이 대회의 여자 단식에선 중국의 리나 선수가 2014년 우승한 바 있다. 앞서 정현은 지난 22일 남자단식 16강전에서 전 세계랭킹 1위인 세르비아의 노바크 조코비치(현 랭킹 14위)를 3-0으로 완파했다.
정현의 메이저 4강 진출은 기적 같은 쾌거다.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테니스는 서구인에게 최적화된 운동으로, 아시아계 선수에겐 넘기 어려운 벽으로 여겨졌다. 현재 남자 테니스에서 세계랭킹이 가장 높은 아시아 선수는 24위인 일본의 니시코리 게이다. 메이저 대회 최고 성적 기록도 2014년 US 오픈에서 준우승한 니시코리가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정현의 이번 호주오픈 4강 진출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 축구 대표팀이 4강에 오른 것에 못지않다. 지금까지 한국 테니스의 메이저 대회 성적은 16강 진출이 최고였다. 1981년 US 오픈 여자 단식에서 이덕희가, 2000년과 2007년 같은 대회 남자단식에서 이형택이 각각 16강에 올랐다. 2013년 세계랭킹 772위에 불과했던 정현이 불과 4년 만에 메이저 대회 4강 진출의 신화를 쓰기까지 얼마나 힘든 길을 달려왔는지 짐작이 간다. 세계 주요 언론들도 정현의 4강 진출을 극찬했다. 미국 스포츠 매체 ESPN은 "정현이 역사를 새로 썼다(Chung makes history)"는 제목을 뽑았고, AP통신은 "만 21세인 정현은 2010년 마린 칠리치 이후 가장 어린 나이에 호주오픈 4강에 진출했다"고 타전했다.
정현은 불모지와 다름없던 한국 테니스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린 데 그치지 않고 스포츠 이상의 감동을 안겨줬다. 이날 SNS에는 정현의 쾌거를 축하하는 글이 쇄도했다. 무엇보다 정현은 한국 청년의 도전정신과 강인한 체력, 세련된 매너와 국제 감각을 전 세계에 유감없이 보여줬다. 정현은 8강전 승리 후 인터뷰에서 "아직 끝난 게 아니니 계속 응원해 달라. 금요일에 뵙겠다"며 일찌감치 4강전에 대한 투지를 다졌다. 지난 22일 조코비치를 꺾은 뒤 인터뷰에서도 "어릴 적 우상인 조코비치를 모방했다"며 패자를 추켜세우는 겸손함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정현은 '3세트에서 추격을 허용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는 말에 "나는 조코비치보다 어리다. 2시간 더 경기할 준비가 돼 있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패한 조코비치가 기자들에게 "오늘 내 부상에 관해 얘기하지 마라. 그것은 정현의 승리를 깎아내리는 행위"라고 할 정도로 경기 외적인 성숙함을 보였다.
정현의 강한 도전정신과 자신감, 수준급의 외국어 구사력, 인터뷰 순발력, 세련된 매너 등은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줬을 것 같다. 우리 20∼30대는 유능하고 능력 있는 세대로 평가받지만, 사상 최악의 취업난으로 능력 발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어릴 때부터 고도 약시였던 정현이 무거운 핸디캡을 극복하고 한국 테니스 역사를 다시 쓴 것은 끝까지 꿈과 희망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실이 어렵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면 언젠가는 희망의 문이 열릴 것이다. 청년 세대의 아름다운 도전이 다음 달 열리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또 한 번 빛을 발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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