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작소설 11월 출간 예정…인간이 사랑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관심"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소설가 한강(48)이 29일 연합뉴스와 단독으로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지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에 관해 "결코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5·18 광주를 다룬 그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지원배제대상(소위 '블랙리스트') 도서 목록에 포함된 바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남한은 전율한다'(원제 '누가 '승리'의 시나리오를 말하는가?')가 한국에서 정치적 논란이 된 것에 관해서는 "정치적인 글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다음은 인터뷰 답변 전문.
-- '채식주의자'로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은 뒤 2년 가까이 언론을 피해온 듯한데, 요즘 근황은.
▲ 2016년 당시에는 인터뷰나 강연 등 요청이 많았지만, 제가 2년 가까이 계속 사양하다 보니 이제는 그전과 비슷한 빈도로 돌아온 것 같아요. 언론을 피했다기보다는, 제가 어떤 일을 완성해서 세상에 내놓는 시점이 아닌데 - 예를 들면 새 책을 출간한다거나 하는- 특별하게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익명성이라는 갑옷을 혼자서 잃어버린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서, 알아보는 분들이 확연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점차 일상이 안정되어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지난 11월까지 여러 차례 외국에 출간 일정이 있어 짧은 여행을 자주 했는데, 나름으로 의미도 있었지만 체력의 소모가 너무 커서 2018년에는 여행 일정을 잡지 않았습니다. 10년 동안 강의했던 학교도 아쉽지만 2월 말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오는 11월 초에 신작을 출간하겠다는 생각으로, 주로 집에서 지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제 시간에 일어나 읽고 쓰고 운동을 하고 제 시간에 잠드는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고 싶습니다.
-- '채식주의자' 수상 이후 '소년이 온다'가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받는 등 해외 독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을 텐데, 작품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 두 작품 모두 각 나라의 역사나 문화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소년이 온다'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채식주의자'보다 더 반응이 깊고 진지했습니다.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과 독재의 경험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영향을 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두 소설 모두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특별히 이해받지 못한 것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라는 장애물을 건너 진실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간혹 한국 사회와 작품들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이 소설들이 한국이라는 특정한 사회의 초상이기보다는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 지난해 10월 뉴욕타임스에 글을 기고한 뒤 작가의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이 잘못됐다는 등 정치적 논란이 있었는데.
▲ 사실 그 글은 현실 정치를 다루고자 한 정치적인 글이 아닙니다. 2016년과 2017년에 본의 아니게 국외 여행을 자주 하다 보니 한국을 둘러싼 정세를 바깥의 시각으로도 보게 되었는데, 의외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위기에도 무감각하며 태연한 대중들이 살고 있는 나라라는 정도의 피상적인 인식이 염려스럽기도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아무리 태연하게 일상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오래된 공포와 긴장이 우리의 내면 깊이 파고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한반도 남쪽에 그러한 진짜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이들이 평화를 옹호하는 존엄한 존재들이라는 구체적 실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 그 글을 쓴 가장 중요한 의도였습니다.
원문이 영어로 번역되고, 제가 편집자와 함께 분량을 줄여가는 과정에서 축약되고, 그것이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읽히면서 제대로 전달이 되지 못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최근에 나온 계간지 문학동네 겨울호에 한국어 원문 전체와 간략한 설명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제기되었던 부수적인 논란의 대부분은 그 지면을 통해 해소될 거라고 봅니다.
-- 지난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 아주 많은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저는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불이익이 있었겠지만, 저보다는 출발선상에 서 있는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에게 훨씬 피해가 컸겠지요. 그런 일이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신작 발표 계획은.
▲ 2015년에 발표한 중편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에 이어 작년에 중편 '작별'을 발표했습니다. 이제 한 편이나 두 편의 중편을 더 써서 연작을 완성하려고 합니다. '겨울' 연작, 또는 '눈' 연작이 될 텐데, 오는 11월에 출간 예정입니다. 겨울에 어울리는 내용이라서 출간 시기부터 먼저 정해 두었어요. 그런데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때가 많고, 완성되기 전까지는 막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게 사실입니다. 만약 2월까지 글쓰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전혀 다른 책을 봄부터 써야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는 인간이 사랑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낭만적인 감정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우리는 사랑함으로써만 끝끝내 인간이 되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즈음 하고 있습니다.
-- 최근 읽은 책 중 인상 깊었던 것은.
▲ 요즘은 약간 배고픈 사람처럼 문예지들을 탐독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부터 최근 것은 물론이고 십년, 이십년 전에 발행된 문예지들까지 순서 없이 다시 꺼내 읽어가고 있습니다. 그 여러 종류의 문학 잡지들에 실린, 사소하거나 진지하거나 치열한 모든 갈래의 언술들이 요즘의 저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2016년에 쏟아진 갑작스런 세간의 관심과 그로 인해 달라진 일상이, 역설적으로 제가 마치 문학의 공간에서 강제로 바깥으로 끌어내어진 것 같은 일종의 박탈감과 상실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인류가 멸망하거나 한국의 인구가 줄어 서서히 사라지는 상상을 할 때, 문예지가 더이상 발간되지 않는 세계를 떠올리게 돼요. 그 상상이 너무 쓸쓸해서, 이 세계가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더 갖게 됩니다.(웃음)
-- 올해 이루고 싶은 목표나 소망이 있다면.
▲ 지금 잡고 있는 '겨울' 또는 '눈' 연작을 잘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저의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선의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무사하면 좋겠습니다.
(①편- 한강 "'채식주의자' 오역 60여개 수정…결정적 장애물 아냐"와 이어지는 기사입니다.)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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