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정부, "배상하겠다→배상금 못 줘" 말 바꿔…韓유족 159명 패소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법원이 일본에서 원폭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의 유족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 정부는 한동안은 한반도 거주 피폭자들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인정하다 슬그머니 말을 바꿔 배상 책임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데, 법원이 판결을 통해 이를 용인한 것이다.
1일 일본 언론들에 따르면 오사카(大阪) 지방재판소는 전날 일제 강점기에 강제징용 등으로 일본에 끌려와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서 원폭 피해를 받은 뒤 한국에 거주한 사람들의 유족들이 배상금 지급을 요구한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원고는 1975~1995년 한국에서 숨진 피폭자 31명의 후손 159명이다.
기누가와 야스키(絹川泰毅)재판장은 판결에서 민법상 '제척(除斥) 기간' 규정을 들며 "제소 시에 이미 사후 20년이 경과해 손해배상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판시했다.
기누가와 재판장은 이어 "비슷한 소송이 1996년에도 제기된 적이 있다"며 "제척 기간이 지나기 전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일본 민법은 "불법행위가 행해진 지 20년이 지나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사라진다"는 제척 기간 규정을 두고 있는데, 법원이 피폭자들에 대해서도 이런 규정이 적용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1975년 피폭자들을 건강관리 수당 등으로 지원하는 '피폭자 원호법'을 제정했지만 대상자들을 일본 거주자로 제한했다.
이 때문에 한국 등 해외에 거주한 피폭자들은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지난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가 일본 정부에 그동안 지원을 하지 않았던 것이 위법하니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리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일본 정부는 이 판결을 받아들여 피폭자측이 소송을 제기해 법원이 배상 대상자라는 판단을 할 경우에는 해외 거주 피폭자에 대해 위자료 100만엔(약 974만원)과 소송 비용 20만엔(약 195만원)을 지급하겠다고 밝혔고, 이에 따라 그동안 6천명의 해외 거주자가 배상을 받았다.
하지만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출범 후 일본 사회에서 급격한 우경화가 진행되면서 일본 정부는 다시 입장을 바꿨다.
제척 기간 조항을 들며 배상의 원인이 되는 일본 정부의 위법행위와 관련한 배상청구권 효력은 피폭자의 사망 시점에서 끝이 났다며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경우는 배상 대상이 아니라고 법원에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각지의 법원에서는 한반도 거주 피폭자들의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이 제기돼 있는데, 법원의 이번 판결은 다른 소송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된다.
일본에서 비슷한 소송을 진행 중인 사람(피폭자 본인과 유족)은 930명으로, 피해자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경우는 600명에 이른다.
bkkim@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