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기수'에서 '공공의 적'으로…렌치 전 伊총리 영욕의 4년

입력 2018-03-06 03:11  

'개혁기수'에서 '공공의 적'으로…렌치 전 伊총리 영욕의 4년
2014년 최연소 총리→2016년 개헌 국민투표 패배로 인기 급락→당 대표 사퇴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4년 전 최연소 총리로 로마에 입성한 뒤 중앙정치 무대에서 줄곧 주인공 역할을 해온 마테오 렌치(43) 전 총리가 4년 만에 무대에서 퇴장했다.
4일 실시된 이탈리아 총선에서 렌치 전 총리가 이끄는 집권 민주당이 극우, 포퓰리즘 정당의 약진에 밀려 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하면서다.



중도좌파 민주당은 이번 총선에서 약 19%의 역대 최저 득표율을 기록하는 수모를 당했다. 렌치 전 총리의 집권 초기였던 2014년 5월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에서 민주당이 40%를 웃도는 득표율로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던 것을 고려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득표율이 불과 4년 사이에 반토막이 난 것이다.
민주당의 몰락은 예고된 것이었다. 더딘 경제회복 속에 빈부 격차가 커지고, 지난 몇 년 간 이어진 난민 대량 유입으로 국민적 불만이 고조되며 상당수의 지지자가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초 예상보다 훨씬 적은 표를 얻은 데 그친데다, 심리적인 저지전인 20%선에도 못미치는 득표율에 민주당은 충격에 휩싸였다.


현지 언론은 5일 오전부터 렌치 전 총리가 민주당 대표에서 사퇴할 것이라는 관측을 앞다퉈 내놓았고, 결국 렌치 전 총리는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당 대표직 사퇴를 발표했다.
그는 총선 전까지만 하더라도 "선거에서 패배해도 당 대표직에서 사퇴하지 않고,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5년 전 선거에서 득표율이 불과 4%에 불과했던 극우정당 동맹에게마저 불과 2%포인트 차로 득표율이 쫓기는 참담한 성적표에 더는 버틸 명분이 없었다.
렌치 전 총리는 정치 생명을 걸고 야심차게 추진한 헌법 개혁 국민투표가 부결돼 총리직을 내놓은 2016년 12월 이래 다시 한번 불명예를 안으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당시에는 당 대표직을 유지함에 따라 총리 복귀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당 역사상 최악의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터라 재기 여부도 장담할 수 없는 정치 인생 최대의 위기로 내몰렸다.
이탈리아를 변모시킬 '개혁의 기수'로 각광받았던 그가 불과 4년 만에 몰락한 것은 이탈리아 정치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극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탈리아 정치연구소인 폴리시 소나의 프란체스코 갈리에티는 "렌치는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단기간에 가장 큰 부침을 겪은 정치인"이라고 지적했다.
2009년 피렌체 시장에 당선되며 이탈리아 정계에 이름을 알린 렌치는 2014년 2월에 39세의 나이로 총리가 된 뒤 노동, 교육 분야에서 구성원들의 거센 저항을 뚫고 일련의 개혁 작업을 추진, '로타마토레'(Rottamatore·파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청바지와 가죽점퍼 차림을 즐기고, 소셜 미디어로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밝히는 참신한 젊은 총리의 등장에 취임 초기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폭발적인 지지가 쏟아졌으나, 거침없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 안팎에서 상당한 적을 양산해야 했다.
당내 좌파 성향의 인사들에게는 당을 너무 오른쪽으로 끌고 간다는 비난을 받았고, 야당 정치인들에게는 독선적이고,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공공의 적'으로 몰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탈리아 정치 체계를 좀 더 단순하고, 효율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고질적인 관료제와 멈춰버린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명분으로 밀어붙인 2016년 개헌 국민투표는 당초 취지와 달리 렌치를 심판하는 국민투표로 변질됐다.
당시 국민투표 국면에서도 오성운동, 북부동맹 등 포퓰리즘, 극우 정당의 파상 공세 속에 쓴잔을 마신 그는 총리직을 당시 외무장관이던 파올로 젠틸로니에 물려주고 물러났다.
민주당 일부 인사들은 국민투표 직후인 작년 초에 실시된 당 대표 선거에서 그가 국민투표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숙해야 한다는 일부 여론에도 불구하고 재출마하자, 민주당을 탈당해 또 다른 좌파정당인 자유와평등(LEU)을 결성했다. LEU로 인해 중도좌파 표가 분산된 것은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고전한 또 다른 이유가 됐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작성한 총선 후보 명부를 놓고도, 렌치 전 총리는 측근들은 대거 당선 안정권에 포진시킨 반면, 자신과 반목하는 반대파 의원들 상당수는 명단에서 아예 뺀 것으로 드러나 민주당을 내홍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
과거에 "당신이 누구를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아느냐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말해 대중을 열광시킨 젊은 정치인의 이런 모습은 구태 정치인의 '측근 챙기기'로 비치며 비판을 불러왔다.
일간 라 레푸블리카는 이번 총선이 "렌치에 대한 두 번째 국민투표" 성격을 띠게 됐다고 규정하며, 렌치가 2016년 12월 국민투표 패배 시 정치에 거리를 두지 않은 채 조급하게 권력을 다시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이미지 쇄신 기회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ykhyun14@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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