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잇는 폭로에 남성들도 "부끄럽다" 자성…대학가·기업서도 변화 움직임
전문가들 "'미투'는 한국사회 판 뒤집는 물결…성폭력 인식 변화해야"
(서울=연합뉴스) 사건팀 = "문화적 대변혁이 일어나려는 것 같다."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미투'(#Metoo) 운동이 각계로 확산하는 상황을 지켜보는 한 인권단체 관계자가 한 말이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문화예술계 인사들부터 대학교수, 정치인 등 유명인사의 성폭력은 물론, 일상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미투'는 한국사회 전방위에 걸친 남성들의 왜곡된 성 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미투'가 본격화하고서 한 달여가 지나는 동안 여성들의 빗발치는 폭로를 접한 한국 남성들 사이에서도 뒤늦게야 여성이 겪는 성폭력 피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성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전문가들은 '미투'가 남성중심적 한국사회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꿀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이를 위해서는 남성 시각에서 만들어진 사법체계를 포함해 성폭력에 대한 사회 전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 "부끄러운 한국 남자"…쏟아지는 '미투'에 남성들도 자성 목소리
'미투' 열풍을 지켜보는 20∼30대 남성 사이에서는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성희롱·성추행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다"는 반응이 나온다.
직장인 김모(31)씨는 7일 "최근 회사 동기가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 있다며 내부에서 '미투'를 제기해 깜짝 놀랐다"면서 "뉴스로 볼 때는 '내 문제'라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성폭력이 어디에나 존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직장인 권모(29)씨는 "'미투' 운동을 보면서 일상에 만연했던 성폭력을 방관했던 기억이 떠올라 부끄러웠다"며 "앞으로는 여성 피해를 목격하게 되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나 자신부터 작은 말실수도 조심하려 한다"고 말했다.
페이스북에서는 '한국 남자가 부끄러운 한국 남자'라는 페이지가 팔로워 3천500명을 넘길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스스로 남성이라고 소개한 페이지 운영자는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웹사이트에 올라오는 여성 성희롱·성추행 게시글을 공유하면서 다른 남성들에게 온라인 여성폭력의 실상을 알리고 있다.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문제가 공론화한 뒤 남성들 사이에서 자성 목소리가 나오는 흐름은 '미투' 등 페미니즘 운동이 먼저 전개된 국가에서도 발견된다.
미국에서는 2014년 유엔 여성기구에서 남성들의 성평등 운동 동참을 독려하는 '히 포 쉬(He For She)' 캠페인이 시작된 후 '#HeForShe'나 '#allmencan(모든 남성은 페미니즘에 공감할 수 있다)' 등 페미니즘 동참 해시태그가 남성 네티즌 사이에서 확산했다.
전문가들은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남성이 늘어나야 주변 남성들도 영향을 받아 사회 전반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고 조언한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남성들이 스스로 돌아보고 각자 여성을 대하는 관점이나 인식을 전환해야 할 때"라면서 "여성 차별 문제는 남성의 동참이 이뤄져야 본질적인 해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만 여성차별적 태도를 고수하면서 '미투' 운동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남성도 여전히 적지 않은 분위기다.
직장인 이모(30)씨는 "최근 친구 결혼식에서 남자 동창들이 오랜만에 모였는데 '미투' 얘기가 나오더라"면서 "'정치적 배경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다 처벌 불가능한 수준이더라' 등 부정적인 반응이 꽤 있었다"고 전했다.
◇ 대학가·기업 조직문화 변화 움직임…'위계질서 문화'에 일침도
대학가와 기업에도 '미투'로 인한 변화의 바람이 서서히 불고 있다.
한 국립대 대학원에 다니는 정모(28·여)씨는 "평소 말이나 행동이 거칠었던 지도교수가 달라진 것을 느낀다"며 "'미투'를 의식해서인지 개인적 부탁이나 잡무도 줄어들고 학생들을 대하는 자세도 덜 권위적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여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수가 "혹시 내가 실수한 것은 없었나"라고 묻거나 교수가 나서서 성희롱 예방 매뉴얼을 만들기도 하는 분위기다.
서울 시내 한 사립대 대학원에 다니는 한모(26·여)씨는 "'미투' 열풍이 분 뒤로 교수들 사이에서 여학생들을 조심하는 미묘한 분위기가 감지된다"며 "다만 남성들이 여성들을 불편해하고 멀리하는 경향 탓에 조교나 연구원 채용에서 여성이 차별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직장인 서모(28·여)씨는 "최근 인사과 직원들이 성폭력 관련 징계에 문제는 없는지, 피해자 보호에 소홀한 점은 없었는지 최근 자체 점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동안 문제가 생기면 감추기에 급급했던 회사가 이만큼 변한 것도 '미투' 열풍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남성들은 아예 문제 소지를 만들지 않으려고 '펜스의 법칙'(Pence's rule)을 따르는 모습도 보였다. '펜스의 법칙'이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성 추문을 피하고자 아내 외에 다른 여성과는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고 밝힌 데서 유래됐다.
직장인 조모(32)씨는 "기본적으로 '미투' 운동의 취지에 공감하지만 여성들을 대하기 어려워진 측면이 있다"면서 "또 다른 성차별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여자 후배와는 따로 사적인 자리를 만들지 않으려 하고 여성이 낀 술자리는 불편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여성을 상대로 한 '권력형 성폭력'의 본질로 지목되는 엄격한 위계질서 문화 자체를 고발하는 의견도 나온다.
7일 홍익대생 커뮤니티에는 모 동아리에서 나왔다는 글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철저한 기수제에 따른 상명하복, 선배 이름과 기수 외우기 강요, 폭언 등 모욕적 언행, 합숙 중 새벽 야외 기합, 이물질 섞은 술 억지로 먹이기, 정해진 인사말 외우기 등 강압적·권위적 폐단이 많다고 지적했다.
글쓴이는 "곧 있으면 새내기들이 이런저런 활동에 참여할 텐데 저희같이 등 떠밀려, 또 울면서 나오게 될 사람들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응원단의 악·폐습을 모든 분께 알리고자 글을 적는다"고 썼다.
◇ "'미투'는 바람 아닌 해일…남성 중심 성폭력 인식도 바꿔야"
전문가들은 그간 성폭력 피해를 겪고도 추가 피해를 우려해 침묵했던 여성들이 저마다 입을 열어 서로를 보호하는 흐름이 형성되면서 '미투'가 한국사회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계기가 됐다고 진단한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미투'는 바람이 아니라 해일"이라며 "여성운동이 그간 '조개 줍는 행위' 정도로 보잘것없는 일로 취급받았지만 '미투'가 한국사회의 판을 뒤집는 물결이 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여성들의 추가 폭로가 가해자의 범죄사실을 입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며 "과거에는 2차, 3차 가해가 두려워 입을 닫았지만, 이제는 '내가 침묵하면 가해자가 피해자로 바뀌겠구나'라는 우려로 추가 폭로가 꼬리를 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현미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장도 "'미투' 운동은 우리 사회가 약자 목소리를 듣고 인식을 바꿀 중요한 기회가 됐다"면서 "권력구조 내 성폭력 문제가 심했던 우리 사회가 이번 일을 계기로 긍정적으로 바뀌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성폭력에 대한 근본 인식은 물론, 이를 범죄로 정의하는 사법체계까지 피해자인 여성 시각에서 재구성돼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윤김지영 교수는 "남성중심적 욕망만이 유일한 사랑법이라는 시각은 연애와 성폭력이 연속선상에 놓여있다고 본다. 그래서 가해자가 '호감이 있는 상태였다', '연애였다'며 2차 가해를 주는 것"이라며 "무엇이 성폭력이고 무엇이 연애인지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김지영 교수는 "피해자 목에 칼이 들어와 항거불능 지경에 가야만 강간으로 인정하는 국내 기준은 남성중심적"이라며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강간이 되는 쪽으로 사법적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투' 운동의 힘이 각 조직에서 성폭력 문제 대응을 위한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양한 집단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미투' 운동이 끝까지 성공하게 하려면 성폭력, 성희롱 등을 각 조직 내에서 어떻게 해소할지 궁리해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며 "의사결정 과정에 여성 등 다양한 소수집단을 넣는 '조직 내 민주화'도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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