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알도 모로 전 이탈리아 총리가 극좌 테러조직인 붉은여단에 의해 납치된 지 꼭 40년이 된 날을 맞아 이탈리아에서 그를 추념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세르지오 마타렐라 대통령, 프란코 가브리엘리 경찰청장 등을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는 16일 오전(현지시간) 당시 사건 현장인 로마 북부 파니가(街)에 모여 모로 전 총리와 그를 지키려다 사망한 경호원들을 기리는 명판을 제막하고, 화환을 헌화했다.
이곳은 1978년 3월16일 붉은여단 조직원들이 의회로 향하던 모로 전 총리의 차량을 급습, 경호원 5명을 사살한 뒤 모로 전 총리를 납치한 장소다.
전후 이탈리아 정치의 중심축이었던 기독교민주당 대표를 지낸 그는 1963∼1968년, 1974∼1976년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 총리로 봉직한 정계의 거두였다.
붉은여단 조직원들은 납치한 모로 전 총리를 자신들의 은신처로 데려간 뒤 그를 볼모삼아 이탈리아 정부를 상대로 감옥에 있는 붉은여단 조직원 석방 등을 조건으로 내건 대담한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테러단체의 협박에 굴하지 않을 것이라며 협상에 응하지 않자 이들은 모로 전 총리를 살해했고, 그의 시신은 가슴에 10여 발의 총탄이 박힌 채 납치 55일 만인 그해 5월9일 로마 중심가의 주차된 차에서 발견됐다.
이탈리아 사회를 뒤흔든 모로 전 총리 암살 사건은 정치적 테러가 빈발해 소위 '납의 시대'로 불리는 이탈리아 현대사의 암흑기에 일어난 사건 가운데도 가장 큰 충격파를 던진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일간 라 레푸블리카의 편집자인 에치오 마우로는 "모로 전 총리 암살 사건은 이탈리아판 '9·11테러'"라고 규정하며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지날 때마다 1978년의 봄과 10여년 간 끔찍한 테러를 겪은 이탈리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납의 시대'에는 5천여 건의 정치테러가 일어나 약 450명이 죽고, 4천50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추산된다. 1969년 17명이 숨진 밀라노폰타나광장 폭탄테러, 1974년 8명이 사망한 브레시아 중심 광장의 폭탄테러, 1980년 85명의 목숨을 앗아간 볼로냐 중앙역 폭탄테러 등 이 기간 크고 작은 테러가 잇따랐다.
사건이 일어난 지 40년이 지났으나, 모로 전 총리의 납치·암살을 둘러싼 진실은 여전히 명확히 밝혀진 게 없어, 갖가지 음모론이 회자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로 전 총리의 피랍 당시 이탈리아 정부가 그의 소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납치범들에게 국가 기밀을 발설할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 그를 구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모로 전 총리는 피랍 기간, 줄리오 안드레오티 총리 등 정부 고위 관료와 집권 기민당 고위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석방을 위해 붉은여단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촉구했으나, 이들은 그를 외면했다.
결국 죽음을 예감한 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장례식에 정부와 기민당 인사들은 참석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말해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모로 전 총리의 장례 미사는 붉은 여단에 "아무 조건 없이 모로 전 총리를 석방하라"고 촉구했던 교황 바오로 6세가 손수 집전했다.
역사학자 필리페 포로는 "모로 전 총리는 공산당의 기성 정치권 참여의 길을 연 공산당과의 '역사적인 타협' 때문에 이탈리아 정치권뿐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탈리아 비밀 정보기관 등에까지 많은 정적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모로 전 총리는 피랍 직전 이탈리아 공산당에 '좌우 연정'을 제의한 상태였고, 이는 좌와 우를 막론한 이탈리아 정가 뿐 아니라 당시 냉전의 두 축인 미국과 소련을 격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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