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주거실험 이끄는 디자인 구루 "집은 미래산업의 교차로"

입력 2018-03-25 10:00   수정 2018-03-25 10:02

日 주거실험 이끄는 디자인 구루 "집은 미래산업의 교차로"
'하우스 비전' 하라 겐야 방한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냉장고를 밖에서 열 수 있는 집, 주방·욕실·정원을 공유하는 임대 타워, 바닥과 벽까지 수납 가구로 된 집…….
일본에서는 건축가와 디자이너, 기업이 참여하는 거대한 주거 실험이 진행 중이다. 이들이 구상하는 집은 단순히 첨단 기술이나 최신 인테리어가 적용된 공간이 아니다. 인구 급감, 고령화, 1인 가구 급증, 인간 소외 등에 대응할 미래의 구체적인 생활상이다. 이 실험에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각국이 앞다퉈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러한 현상들이 일본만의 문제에 머무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2011년 시작된 '하우스 비전'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일본 디자인 구루' 하라 겐야(60)가 있다. 그는 디자이너들의 존경을 받는 디자이너로 불린다. 그에게 가장 큰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2001년부터 함께 일해온 생활브랜드 무인양품 디자인이다. 군더더기가 없고 기능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무인양품은 미니멀리즘 시대를 만나 갈수록 인기다. '하우스 비전' 또한 무인양품에서 시작됐다.
"무인양품의 미래형으로, 집의 모든 것을 원스톱으로 살 수 있는 가게가 생기면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어요. 주택까지 팔기 시작한 무인양품의 미래를 생각하던 중에 자연스럽게 '하우스 비전'을 구상하게 됐습니다."
서울디자인재단 초청으로 '하우스비전 서울'을 협의하기 위해 23일 방한한 하라 겐야를 인터뷰했다. 그는 집을 재산 증식이나 투기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을 밀어내면서 "집은 실로 다양한 미래 산업의 교차로"라고 강조했다.
"집은 센서부터 빅 데이터, IOT, 에너지, 이동, 통신, 물류, 공유경제, 전통과 미의식, 자원, 고령화 대책, 관광과 연결돼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집은 건축가와 부동산 회사가 인식하는 집과는 전혀 다릅니다."



한국, 일본 할 것 없이 대다수는 자신의 집에 몸과 삶을 맞춰 살아간다. 그러나 '하우스 비전'은 "각자 생활양식에 맞는 주거를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기업들과의 협업을 통해 그 가능성을 우리 눈앞에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이 프로젝트의 미덕이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2016년 '하우스 비전' 전람회에 등장했던 '냉장고를 밖에서 여는 집'이다. 대문 옆에 또 다른 문이 있어서 사람이 없어도 식품과 의약품, 골프 장비 등을 전달받을 수 있다. 물류배송 기업인 야마토 홀딩스와 디자이너 시바타 후미에가 물류 데이터의 흐름, 1인 가구, 고령화, 보안 문제 등을 함께 조사하고 고민한 결과다.
'하우스 비전'이 일본 사회에서 설득력을 얻게 된 데는 3·11 대지진도 큰 영향을 미쳤다. "3·11 이후 집을 '재산'으로 여기는 사람이 격감했습니다. 이제 집은 삶을 위한 것이며, 자신의 생활에 의욕과 지침을 주는 도구인 것이죠. 재해로 일본인이 인구의 퇴화를 명확하게 자각한 것도 큰 전환점이라고 봅니다."
'하우스비전'은 땅을 향한 욕망이 들끓는 가운데 늙어가는 도시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하는 서울에도 여러 시사점을 준다.
디자이너는 바람직한 도시재생의 방향을 묻자 "도시는 계획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수많은 사람의 욕망이 서로 합쳐진 결과"라는 말로 운을 뗐다.
"사람들의 '욕망'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을 보다 성숙되고 세련되게 이끄는 것은 무엇일까요. 낙서가 없어지고 가로등이 꺼진 채로 방치되지 않으며 공중화장실이 깨끗하게 유지될 때 도시는 또 한 걸음 성숙된 세련됨에 가까워집니다. 그렇게 도시를 성장시키고, 사람의 욕망을 다스려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디자인의 역할입니다."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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