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 경험 자전소설 '다크 챕터' 펴낸 위니 리 기자간담회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수치심은 만들어지는 감정입니다. 나는 '성폭행은 무조건 가해자 잘못인데 왜 피해자인 내가 수치심을 가져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수치심을 처음부터 단호히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성폭행 피해 경험을 쓴 자전소설 '다크 챕터'(한길사)의 작가 위니 리(40)는 26일 서울 서소문로 순화동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수치심 때문에 많은 성폭행 희생자들이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며 피해자들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난 대만계 미국인 위니 리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에서 영화제작자로 활동하던 중 2008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하이킹을 하다 낯선 15세 소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는 "이 사건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고 표현했다. 이후 그는 5∼6년 동안 치유의 과정을 거쳐 이 경험을 생생히 담은 자전소설 '다크 챕터'를 썼다. 소설에는 그를 모델로 한 주인공이 성폭행을 당하는 고통스러운 순간뿐 아니라 이후 어떤 일을 겪는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 등의 이야기가 담겼다.
작가는 "나는 여섯 살부터 글쓰기를 즐겨하는 소녀였다. 글쓰기는 나에게 힘을 주고 세상을 알아가게 하는 방법 중 하나다. 이런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글로 옮기지 않는 게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소설 집필에는 역시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주위 친구들에게서 비슷한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성폭력이 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걸 글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용기를 내게 됐다"고 집필 의도를 설명했다.
이어 "이 소설을 통해 피해자들이 흔히 알려진 나약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과거가 있었고 밝은 미래가 있으며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이 소설은 피해자인 '그녀'의 이야기와 함께 가해자인 '그'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풀어가며 사회적으로 성폭행 범죄가 쉽게 벌어지는 환경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보여준다.
이에 관해 작가는 "이 소년이 내 인생을 망가뜨리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무엇이 이 소년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궁금했다. 이 소년의 성장 배경과 범죄의 요인을 파악하고 공유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런 성폭력 문제가 지속적으로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가해자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앞으로 우리가 성폭력 피해를 근절하고 방지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고 했다.
또 피해 경험을 밝히고 공론화하는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내 경우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영화제작자로 일한, 나름의 상류층 삶이 피해 사실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데 도움이 됐다. 미디어에서 내 얘기를 많이 믿어줬다. 하지만 많은 피해자가 나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서구 사회에서도 중상류층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하면 언론에 보도가 되지만, 이민자나 외국인노동자 같은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하면 이슈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큰 문제다. 그래서 SNS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경험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 피해자들은 초반에 익명성을 보장받으며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 이런 이야기들이 공유되면 여러 개의 점이 연결되듯 연대가 구축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소설은 영국에서 지난해 6월 출간돼 가디언지의 '독자가 뽑은 최고의 소설'로 선정됐으며, 지금까지 한국을 포함해 세계 10개국에 판권이 팔렸다.
작가는 "한국은 이 소설을 출간하는 아시아의 첫 번째 국가여서 큰 의미가 있다. 한국에 오게 돼 굉장히 흥분돼있는 상태"라며 "한국에서 현재 '미투'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는 기사들을 많이 접했는데, 이런 시기에 맞물려 책을 출간하게 돼 기쁘다. 그동안 권력을 지녔던 가해자들이 고소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피해자, 생존자, 페미니스트들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기대했다.
그는 현재 런던정치경제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미디어 박사과정을 밟으며 성폭력에 대한 공개 담론과 소셜미디어(SNS) 역할 및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또 성폭행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단체 '클리어 라인스 페스티벌(The Clear Lines Festival)'을 설립해 예술과 토론으로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는 여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예술과 문화를 통해 성폭력 문제에 관한 토론의 장을 만들고 싶어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영국에서 '클리어 라인스 페스티벌'을 2015년과 2017년에 열었어요. 여러 예술공연과 토론을 하면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미국과 스코틀랜드에서도 같은 이름의 페스티벌을 준비 중인데요, 한국에서도 이 페스티벌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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