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발의 아닌 정부·대통령 발의는 총 5번…이번이 6번째
(서울=연합뉴스) 박경준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아랍에미리트(UAE) 현지에서 전자결재로 정부 개헌안 발의를 재가함으로써 개헌 문제가 법적인 절차에 공식 돌입했다.
대통령이 직접 개헌안 발의권을 행사한 것은 1980년 이후 38년 만이다.
개헌의 내용과 시기를 놓고 여야의 견해차가 워낙 큰 탓에 극적인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는 한 국회 통과 가능성이 크지는 않은 상황이다.
정부 개헌안이 가까스로 국회의 문턱을 넘든, 그 사이에 여야가 합의해 국회 개헌안을 마련하든 국민투표에서 과반의 찬성을 얻으면 그 순간은 48년 헌법제정 이래 10번째 개헌의 역사로 남게 된다.
첫 번째 개헌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7월 4일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이뤄졌다.
제헌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했는데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이 패하며 재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1951년 11월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발의했고 이는 부결됐다.
다수 의석을 점한 야당은 1952년 4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그해 5월에 부결됐던 개헌안과 같은 내용을 발의했다.
여야의 대립 속에서 정부 안의 대통령 직선제와 야당 안의 내각책임제를 섞은 개헌안이 제시됐고 이 안이 국회에서 의결됐다. '발췌개헌'으로 불리는 1차 헌법개정이다.
2차 헌법개정은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이다.
1954년 1월 23일 정부는 외국인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경제 관련 규정을 자유화하고자 개헌안을 냈다가 같은 해 3월 9일 국회 임기가 끝나간다는 이유로 철회를 요청했고 엿새 뒤 국회가 이를 받아들여 폐기됐다.
그해 5월 치러진 민의원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철폐하고 장기집권의 길을 여는 개헌안을 발의했다.
11월 27일 표결에서 나온 결과는 재석 203인 중 가135, 부60, 무효1, 기권6, 결석1이었다. 개헌 요건인 재석의원 3분의 2인 135.333…을 넘으려면 136표가 나와야 하는데 1표가 모자라 부결이 선포됐다.
그러나 하루 뒤 자유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열어 0.333…은 '사사오입'에 따라 버릴 수 있다고 해석했고, 결국 정부는 대학 수학과 교수까지 동원해 억지논리를 만든 끝에 개헌을 완성했다.
3차 개헌은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따른 4·19 혁명의 영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이뤄졌다.
그해 4월 26일에 구성된 헌법기초특별위원회는 민주당의 안과 자유당 혁신파의 안을 중심으로 의원내각제를 주요 내용으로 한 요강을 작성, 6월 15일에 표결에 부쳐 개헌안을 가결했다.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 침해를 금지하는 조항을 신설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사전허가나 검열을 금지하는 한편,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는 등 앞선 헌법에 비해 민주주의 요건을 비교적 충실히 담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4차 개헌은 같은 해 반민주행위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소급입법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 이뤄졌다.
3·15 부정선거의 책임자와 4·19 혁명 당시 군중들을 살상한 관련자들을 처벌하라는 민중의 요구가 거세지면서 개헌안이 발의돼 11월 23일에 가결됐다.
5차 개헌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이뤄졌다.
군부가 조직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1962년 7월 헌법심의위원회를 설치해 헌법 개정안을 작성했고 11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의결돼 12월 17일 국민투표로 확정됐다.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 이념이 새 헌법의 정신적 기반이라는 내용을 넣어 최초로 헌법전문을 수정했고 단원제 국회와 한 차례에 한해 중임이 가능한 대통령제 정부 형태를 채택했다.
6차 개헌은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3선에 도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공화당이 추진해 '3선 개헌'으로 잘 알려져 있다.
8월 7일 공화당 윤치영 의원 외 121명이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세 번에 한한다는 개헌안을 제안해 9월 14일, 122명 출석에 122명 찬성으로 가결됐다.
표결에 반대표가 없었던 이유는 13일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이 선포된 후 야당인 신민당이 단상을 점거하자 14일 새벽 2시 33분에 공화당 의원들이 국회 제3 별관에 몰래 모여 표결했기 때문이다. 헌법 개정안 가결 선포 시각은 새벽 2시 50분이었다.
6차 개헌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유신선언'을 한다.
당시 헌법과 체제가 동서 냉전체제에서 만들어졌고 남북대화를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제정돼 개혁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정당·정치활동이 중단됐고 헌법의 일부 조항의 효력이 정지됐다. 국회의 권한은 비상국무회의가 대행하게 됐고 대학 휴교 조치와 언론 검열 등이 시작됐다.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6일에 개헌안을 의결해 공고했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과반의 찬성을 얻어 12월에 공포됐다. '유신헌법'이 등장한 7차 개헌이었다.
8차 개헌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다음 이뤄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0년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헌법개정 작업을 진행했다.
1980년 10월 27일에 공포된 헌법은 전문 중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이념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삭제됐고 대통령 간선제 및 7년 단임제를 채택했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강하고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에 대한 침해금지 조항을 두는 한편, 대통령의 국회해산권과 비상조치권을 제한해 악용 내지 남용의 소지를 줄였다.
'유신헌법'보다는 다소 나아졌다는 평가를 받지만, 군사쿠데타 세력이 조성한 강압적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탓에 진정한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9차 개헌은 대통령직선제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촉발했다.
민정당 노태우 대표가 1987년 6월 29일 대통령직선제를 약속한 데 이어 여당의 6년 대통령 단임제와 야당의 4년 대통령 연임제를 절충한 여야 합의 개헌안이 국회에서 발의됐다.
9월 21일 공고, 10월 12일 국회 의결 절차를 거쳐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 93.1%의 찬성으로 개헌이 확정됐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의원 발의를 제외하고 정부 발의를 포함한 대통령 발의는 총 5번이다.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은 6번째 대통령 발의다. 국회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서 과반 찬성을 얻으면 대통령 개헌안이 공포되는 세 번째 사례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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