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답안지'·'조선시대 시권' 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어느 시대인들 도둑이 없고 어느 나라인들 도적이 없겠습니까. (중략) 하지만 인(仁)으로 백성에게 젖어들게 하여 스스로 교화하도록 하는 것이 어찌 군주 된 이가 먼저 해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조선 숙종 16년(1690)에 치러진 문과 과거에서 장원을 차지한 조덕순(1652∼1693)은 시험지인 시권(試券)에 강력하게 법을 집행하기보다는 백성을 교화해야 도둑이 줄어들 것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그가 장원 급제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경북 영양에 살던 조덕순은 한양에 당도한 뒤에 여론 탐문을 시작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도둑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자연스레 도둑을 줄일 방안을 고민했고, 이튿날 시험지를 받고는 그 대안을 적어 내려갔다. 문제가 다름 아니라 도둑을 다스리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이처럼 조선시대 과거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교양서 '선비의 답안지'와 시권 90종을 우리말로 옮긴 학술서 '조선시대 시권 - 정서와 역주'를 동시에 출간했다.
조덕순이 현실에 대한 통찰로 장원이 됐다면, 박세당(1629∼1703)은 현종 1년(1660) 문과에서 권력과 왕실의 축재(蓄財)를 과감하게 비판해 수석에 올랐다.
박세당은 시권에 "백성이 풍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풍족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백성이 부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풍족할 수 있겠느냐"며 "왕자(王者)는 사사로운 재물이 없다"고 적었다.
고려 광종 때 시작된 과거제는 조선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1894년 과거가 폐지되기까지 조선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시행된 정기시험인 식년시가 165회, 수시로 거행된 특별시험이 583회 열렸다.
과거가 1년에 1회 이상 개최됐지만, 응시자가 나날이 늘어난 탓에 급제는 바늘구멍과 같았다. 예비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소과의 합격자 평균 연령은 15세기에 25세였으나, 19세기 후반에는 37세로 높아졌다. 문과 합격자도 18세기 후반에는 40세에 육박했다.
영조 46년(1770)에는 80대 고령 합격자가 나오기도 했다. 평안도 정주 출신의 신수채는 84세, 전라도 남원 유생인 이요팔은 81세에 소과에 합격했다. 이에 영조는 왕릉을 지키는 종9품 벼슬인 참봉직을 제수했다.
조선이 의와 예를 내세운 사회였지만, 과거에 부정행위가 없지는 않았다. 조선 후기 경남 합천 사람인 유광억은 대리시험에 능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는 대필로 큰돈을 벌었으나, 결국에는 비리가 적발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선비들이 급제에 매달린 이유는 신분 상승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합격자 명단을 붙이는 출방(出榜)의 순간이면 궁궐이나 도성의 문 앞에 인파가 몰렸다. 서찬규(1825∼1905)는 "방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쳐 잠시도 머물기 어려웠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급제의 감격은 합격 60주년을 의미하는 '회방'(回榜)을 통해 다시 한 번 느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임금은 회방을 맞은 선비에게 어사화와 급제 증서인 홍패(紅牌)를 선물했다.
이번 연구의 책임자인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과거는 개인의 영광을 위해 마련한 제도가 아니라 국가경영에 동참할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였다"며 "권위와 절차는 엄정했고, 응시자는 질문의 정곡을 찌르는 답안을 써야만 합격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선비의 답안지 = 360쪽. 1만6천원. 조선시대 시권 = 764쪽. 5만원.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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