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킹 목사 50주기와 차별 철폐의 꿈

입력 2018-04-03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킹 목사 50주기와 차별 철폐의 꿈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제가 죽으면 저를 위해 길게 장례식을 치르지 마십시오. 긴 조사(弔辭)도 필요 없습니다. 제가 노벨상 수상자이고 그 밖에 많은 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언급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자 노력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 했으며, 전쟁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들에게는 입을 것을 주려고 힘썼으며 인간다움을 지키고 사랑하는 데 몸 바친 사람으로 기억되기 바랍니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는 자신에게 곧 닥쳐올 운명을 예감한 듯 1968년 2월 4일 고향인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버니저 교회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이같이 설교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4월 4일 오후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총성이 울렸다.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멤피스를 찾은 킹 목사는 숙소인 로레인모텔 306호 발코니에서 거리의 군중과 이야기하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과다출혈로 1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범인인 제임스 얼 레이는 6월 8일 영국 런던에서 체포돼 99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킹 목사의 피살을 둘러싸고 FBI와 군부 배후설 등 온갖 음모론이 제기됐으나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레이는 1998년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그가 백인우월주의자에게 살해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분노한 흑인들은 미국 전역의 168개 도시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폭동으로 번져 46명이 죽고 2만1천여 명이 부상하고 2천600여 곳이 불에 탔다. 린든 존슨 대통령이 국장일로 선포한 4월 9일 애틀랜타 에버니저 교회에서 열린 영결식에서는 두 달 전 킹 목사가 이곳에서 설교할 때 녹음된 육성이 흘러나왔다. 백인들까지 애도하는 가운데 시신은 애틀랜타 묘지에 묻혔다. 석관에는 그가 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의 마지막 문장인 "마침내 제가 자유로워졌나이다!"가 새겨졌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원래 이름은 마이클 킹 주니어였다. 침례교 목사인 마이클 킹 시니어는 아들이 5살 때 서독을 방문하고 돌아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기리는 뜻에서 자신과 아들의 이름을 마틴 루서(마르틴 루터의 미국식 발음)로 바꿨다. 킹 주니어도 크로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돼 1954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듬해 12월 몽고메리에서 시작된 '버스 보이콧' 운동은 그를 저명한 흑인민권운동가로 만들었다. 버스 앞좌석에 앉은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자 킹 목사는 버스 탑승 거부운동을 주도해 "인종 간 버스 좌석 분리는 위헌"이라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끌어냈다.


1960년을 전후해 미국에서는 흑백 갈등으로 인한 유혈 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잔인한 폭력을 동원해 흑인들을 탄압하자 흑인들의 투쟁도 격렬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킹 목사는 비폭력 투쟁 노선을 고수하며 흑인에게는 자긍심을 불어넣고 백인에게는 부끄러움을 깨닫게 했다. 노예해방 선언 100주년을 맞아 1963년 8월 28일 워싱턴DC에서는 인종차별 철폐와 직업·자유를 촉구하는 군중 25만 명이 운집해 국회의사당 앞에서 링컨기념관 앞까지 행진했다. 5명 가운데 1명꼴로 백인의 모습도 보였다. 행진이 끝나고 연단에 오른 킹 목사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중략) 네 자녀가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1964년 1월 '타임'지는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해 10월에는 역대 최연소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에 뽑혔다. 이를 계기로 킹 목사는 흑인 차별 철폐운동에만 머물지 않고 시야를 넓혔다. 노동조합과 손을 잡고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에 힘쓰는가 하면 베트남전 참전 희생자가 대부분 빈민 청년이라는 점에 주목해 반전운동에도 뛰어들었다. 그의 노선을 놓고 흑인운동 진영 안에서도 비판이 일었고 성 추문이나 논문 표절 등 각종 의혹과 논란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비운의 죽음은 모든 허물을 덮고 그를 위대한 민권운동가로 만들었다. 미국 성공회와 루터교회는 성인(聖人)으로 추대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인 가운데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딴 국가공휴일(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날)을 제정해 1986년부터 1월 셋째 월요일마다 기념행사를 펼치고 있다. 미국 730개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겼고, 곳곳에 기념관이 들어섰으며, 2011년 8월 워싱턴DC 내셔널몰에 대형 석상이 세워졌다.


지난 3월 24일 워싱턴DC에서는 80만 명을 헤아리는 군중이 국회의사당에서 백악관을 잇는 펜실베이니아 애비뉴를 가득 메웠다. 2월 14일 총기 참사가 일어난 플로리다주 마저리 스톤맨 더글러스고교 학생들이 앞장섰고, 전국 각지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총기 규제 법안 제정을 촉구했다. 55년 전 킹 목사가 열변을 토하던 이 자리에서 그의 9살짜리 손녀 욜란다 킹은 이렇게 호소했다. "할아버지에겐 네 자녀가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 사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지금 제게도 꿈이 있습니다. 바로 총기 폭력이 없는 세상입니다."

지난 1일은 부활절이었다. 4일은 킹 목사가 타계한 지 50주년을 맞는 날이다. 차별과 탄압에 맞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치다가 희생된 킹 목사는 인류의 가슴속에 인권과 평화와 상징으로 다시 살아났다. 그가 이끈 워싱턴 대행진은 이후 비폭력 평화 집회의 롤모델이 됐고, 그가 품은 차별 철폐의 꿈은 유색인종·빈민·이주민·여성·장애인 등 전 세계 소수자와 약자의 가슴에 새겨졌다. 존 레넌의 아내이자 전위예술가인 오노 요코는 "혼자 꾸는 꿈은 단지 꿈일 뿐이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말했다. 킹 목사의 온전한 부활을 위해 모두 함께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꿔보자.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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