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제주4·3평화공원, 새벽부터 유족들 발길 이어져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산 사람은 어떻게라도 살아야 했습니다."
잔인한 4월의 그 날은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왔다.
제주4·3희생자 추념일인 3일 새벽 제주시 봉개동 4·3 평화공원 내 행불인 표석.
시신조차 찾지 못한 행방불명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3천800여 기의 표석은 70년이란 긴 세월의 무게 만큼이나 무겁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은 이순자(75·여·경주시)씨는 아침 이슬을 머금은 표석을 닦으며, 도저히 잊을 수 없어 응어리처럼 가슴에 남은 한(恨)을 달랬다.
"스물일곱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너무 불쌍하지 않아요."
이씨의 아버지 이원형 선생은 1950년 6월 제주읍 용강리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에 의해 마포형무소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이씨는 "아버지 잃고 이어 어머니와 동생까지…. 고아로 살아가는 게 너무나 힘이 들었어요. 그래도 살다 보니 살게 됐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함께 온 고모 이옥순(82·여·제주시)씨는 가슴이 아픈 듯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보겠다고 경주서 딸이 왔어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다 보니 (조카는) 경주까지 흘러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7년 7개월간 몰아친 4·3의 광풍과 이어진 연좌제 몰이에서 견디다 못해 제주를 피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4·3은 가족을 잃게 만들었고, 정든 고향마저 떠나게 했다.
딸 이순자씨는 "네 식구가 함께 남들처럼 한가족으로 사는 게 소원이었다. 앞으로 4·3으로 부모 잃은 사람이 대우받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마지막 바람을 전했다.
이씨 가족은 멀리 경주에서 사 온 황남빵을 올리며 절을 하고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제주, 경인, 영남, 호남, 대전….
제주만이 아닌 전국 어디론 가로 끌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이름을 찾아 유족들의 발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1만3천900여 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위패봉안실에도 슬픔은 무겁게 드리워있었다.
유족들은 국화를 올리고, 손수건으로 위패를 닦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찾아온 전연숙(59·여)씨는 그날을 알지 못하지만, 친정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전씨는 "어머니가 항상 말씀하셨어요. 4·3 당시 피해 다니다가 결국 동굴로까지 숨어들어 갔는데 군인들이 들이닥쳐 무차별로 총을 쏘아댔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그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다른 지역에서는 '폭도' 또는 '빨갱이'로 알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전씨는 "4·3은 제주도민 전체의 한으로 남았다. 부디 명확하게 밝혀지고 알려져 우리 어머니를 비롯해 살아계신 분들이 억울함을 풀고 하늘나라로 가실 수 있으면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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