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은 트럼펫 작품 헌정받은 호칸 하르덴베리에르…이달 서울시향과 협연
(서울=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금관 악기 중 가장 높은 음을 내는 트럼펫은 오케스트라 내 조역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악기 고유의 날카롭고 강렬한 소리 때문에 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화성적 뒷받침이 필요할 때 간간이 쓰인다.
그러나 스웨덴 출신 트럼페터 호칸 하르덴베리에르(57)은 '금빛' 트럼펫 선율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확장하고 있는 연주자다.
수많은 작곡가가 그를 위해 조역에 그치던 트럼펫을 무대 중심으로 끌어내 곡을 쓰고 있다. 그는 역사상 가장 많은 트럼펫 작품을 헌정 받은 연주자 중 한 명이 됐다. 영국 작곡가 터니지는 그의 이름을 딴 트럼펫 협주곡 '호칸'을 헌정했을 정도다.
최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내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힘차고 남성적인 트럼펫 소리처럼 호쾌하고 시원시원한 말투로 "최근 50년간 트럼펫이 독주 악기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선 어떤지 모르겠지만 과거 유럽에서 트럼펫은 노동자들의 악기로 인식되곤 했어요.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처럼 비싼 악기도 아니고, 야외에서도 연주할 수 있는 악기이기 때문이죠. 군악이나 행진 시 자주 만날 수 있던 악기였죠. 오케스트라에서는 별달리 중요한 위치를 인정받지 못했어요. 브람스나 멘델스존, 차이콥스키 등 낭만시대 작곡가들은 아직 기능적으로 부족한 악기라는 이유로 트럼펫을 위한 협주곡을 쓰지도 않았죠."
그러나 악기의 개량, 재즈 음악의 인기 등으로 트럼펫이 많은 동시대 작곡가들에게 '친숙한' 악기가 됐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기존 작곡가들이 트럼펫을 위한 곡을 안 썼으니 현대 작곡가들이 새로운 곡을 쓸 때 트럼펫을 많이 떠올릴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동시대 작곡가들의 표현력과 영감에 트럼펫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생각하는 트럼펫의 가장 큰 매력은 "인간의 목소리와 닮은 소리를 낸다"는 점이다.
"입술에 악기를 대고, 오롯이 인간의 숨을 불어넣어 소리를 만들어 내는 악기입니다. 활이나 스틱 같은 도구가 전혀 필요 없죠. 금속으로 이뤄진 악기지만 제 몸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이 악기에 열심히 공기를 불어넣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전 이 악기와 함께 호흡하고 움직이고 있다고 느껴요."
그는 12일 실내악 공연을 마치고 오는 18~1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과 4번째 협연 무대를 선보인다.
특히 그가 선보이는 베른트 알로이스 치머만(1918~1970)의 트럼펫 협주곡 '아무도 내가 아는 고통을 모른다'는 2013년에도 서울시향과 함께 연주했던 곡으로, '반(反) 인종주의'와 우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는 "치머만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올해에만 치머만 곡을 약 20번 정도 연주한다"며 "내 커리어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곡"이라고 설명했다.
"애초 치머만이 이 곡을 썼을 때 많은 사람이 이 곡은 연주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죠. 19세기 미국에서 노예들이 부르던 흑인 영가에서 영감을 얻은 곡으로, 아카데믹한 부분부터 재즈적인 요소까지 많은 부분을 고려해야 하는 곡입니다."
트럼펫 레퍼토리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는 그지만, 이 악기와의 첫 만남은 우연처럼 이뤄졌다. 8세 때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싸구려 트럼펫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아버지는 전혀 음악과 상관없던 사람이셨죠. 아버지가 루이 암스트롱을 떠올리며 장난처럼 선물한 트럼펫이 저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습니다."
그는 트럼펫 연주자로서 "긴장과 불안보다는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트럼펫은 주변 환경에 예민해 다루기 어려운 악기로 통한다. 소위 '삑사리'를 내기 쉬운 악기라 연주자도, 관객도 조마조마할 때가 많다.
"저 역시 트럼펫이 어려운 악기라는 점에는 공감합니다. 제 스승 중 한 분은 '좋은 트럼펫 연주자가 되려면 한 번의 생으로도, 두 번의 생으로도 부족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죠.(웃음) 그러나 전 사실 공연에서 많이 긴장하는 편은 아닙니다. 관객들과 나누는 대화, 함께 하는 파티라는 생각으로 공연에 임하고 있어요. 아, 정말 많은 연습을 하는 것도 제가 긴장을 덜하는 이유일 수 있겠네요.(웃음)"
sj9974@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