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셀러 열풍, 방송·아이돌 SNS 타고 출판시장 흔들어
스타들은 이미지 제고에 도움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그렇지 않아도 잘생기고 예쁘고 멋진 스타들이 손에 책까지 들고 있으면 더 멋져 보인다. 마음의 양식으로 불리는 책을 통해 그 사람의 교양과 내면의 깊이가 드러난다는 보편적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 장면이 설령 TV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연출된 장면이라 하더라도 배우의 얼굴과 함께 잡힌 책, 특히 문학책 표지는 시청자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한다.
이렇게 TV에 등장하거나 스타들이 읽는 책으로 SNS 등 인터넷에서 퍼져 폭발적인 관심을 받는 '미디어셀러'가 최근 서점가를 지배하고 있다. 이전에도 이런 책이 꽤 있었지만, SNS로 확산이 더 빨라진 시대가 되면서 더 두드러진 현상이다.
인터넷·영상문화 발달로 책이 잘 팔리지 않아 울상이었던 출판·문학계는 당연히 두 팔 벌려 환영하고, 방송·연예계에서도 책의 힘으로 콘텐츠와 스타의 품격을 높이는 효과가 있어 적극 활용하는 추세다. '윈-윈'하는 결과여서 앞으로도 미디어셀러는 비중이 더 커질 전망이다.
◇ TV로 들어간 문학…시·소설·에세이에 관심 = 온라인서점 예스24에 따르면 나희덕 시인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문학동네)는 수록시 '푸른밤'이 이달 9일 SBS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에서 낭독되면서 직후 4일간 판매량이 직전 동기간에 비해 12배 이상 뛰었다.
시 첫 구절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는 최근 SNS에서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다. 2004년 출간된 책이 새삼스럽게 다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시는 아이돌그룹 워너원 멤버 옹성우가 공식 카페에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준 시인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는 2012년 출간됐는데, 3년 뒤인 2015년 배우 예지원이 O tvN '비밀독서단'에서 소개하면서 판매량이 급증했다. 이후 SNS에서 자주 언급되면서 꾸준히 팔리다가 최근 MBC 주말드라마 '부잣집 아들'에 등장하면서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원로 시인 정현종의 시도 지난해 말 tvN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주인공이 낭독하면서 젊은층에서 큰 인기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짧은 시 '섬'과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라고 시작하는 '방문객'이 특히 젊은 독자의 감성을 저격했다. 정현종의 시들은 최근 다시 tvN 드라마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 등장하면서 관심을 받아 서점가에서 '정현종 시전집'(문학과지성사)을 찾는 젊은이가 늘었다.
이달 6일 방송된 tvN '숲속의 작은 집'에서 소지섭이 읽은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마음산책)는 다음날인 7일부터 예스24에서 1천 부 가까이 팔려나갔고, 주요 서점에서 시·에세이 부문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박신혜가 읽은 기욤 뮈소의 소설 '파리의 아파트'도 판매량이 부쩍 늘어 지난주 교보문고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9위에 올랐다.
◇ 아이돌 스타들이 소개한 책 '불티' = 특히 아이돌이 젊은층 문화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좋아하는 스타와 같은 문화, 감성을 공유하고 싶어하는 팬들은 책 구입에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나선다. 아이돌이 띄워 베스트셀러가 되는 '아이돌셀러'가 쏟아지는 이유다.
엑소 세훈이 지난 1월 인스타그램에 올린 박준 시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난다)의 한 페이지는 팬들 사이에서 열풍을 일으켰다. 다음 날 아침부터 주문이 폭주해 중쇄를 찍었다.
박준 시인의 애독자들이 많아 작년까지 10만 부를 찍으며 인기를 끌긴 했지만, 아이돌 스타의 언급으로 단숨에 4만부가 팔려나갔다. 이 산문집을 엮은 김민정 난다 대표는 "엑소가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아 최근 대만과 인도네시아, 남미 등에서까지 판권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여성문제를 다룬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은 지난해 문학 부문 최고 베스트셀러이긴 했지만, 지난달 걸그룹 레드벨벳 아이린이 한 인터뷰에서 읽었다고 언급하면서 판매량이 훌쩍 뛰었다. 1주일 만에 7만 부가 팔려나갔고, 젊은층에서 계속 화제가 되면서 지난주까지 총 70만부 판매 기록을 썼다.
방탄소년단이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고전 소설 '데미안'도 원래 판매가 꾸준하긴 했지만, 방탄소년단으로 이슈가 된 이후 판매량이 부쩍 늘었다.
설리가 공항에서 손에 들고 있는 책으로 사진에 포착된 박상수 시집 '숙녀의 기분'(문학동네)도 이후 수천 부가 며칠 만에 팔려나갔다.
워너원 강다니엘이 한 미디어에서 언급한 창비의 시 어플리케이션 '시요일'은 접속이 폭주해 몇 시간 동안 마비되기도 했다.
◇ 출판사들 "PPL·협찬 아냐…자발적 소개에 그저 고마울 뿐" = 이렇게 방송에 소개되거나 아이돌이 언급하는 책들에 출판사들의 광고나 협찬이 배경이 된 것 아니냐는 의심 어린 시선이 있지만, 출판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특히 방송의 경우에는 PPL을 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데, 가뜩이나 최근 장사가 안되는 출판사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것이다. 또 비용 대비 효과가 그만큼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아 위험을 감수하고 돈을 쓸 여유는 없다는 설명이다.
문학동네 관계자는 "최근 드라마 작가들이 극중 시를 넣고 싶다며 허락을 구하는 전화가 많이 온다"며 "드라마가 전달하려는 정서와 시가 잘 맞아떨어지면 시청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때문에 시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tvN 드라마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현대인들에게 잃어버린 감성을 되찾아준다는 콘셉트로 기획돼 매회 좋은 시를 소개한다.
민음사 관계자 역시 "출판사 매출 규모로는 PPL에 들어가기 쉽지 않다"며 "방송에서 유명인이 읽거나 언급해주면 출판사 자체 홍보와는 차원이 다른 판매량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엄청나게 고마울 뿐이다"라고 했다.
아이돌, 스타들의 문학작품, 책 언급은 순수하게 감동받고 SNS에 올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에 적극 활용하는 전략적인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문학작품은 예술가로서의 풍부하고 섬세한 감성과 연결되고, 교양과 지적인 면모를 부각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 안에서 쉽게 소비되곤 하는 아이돌 이미지에 한층 품격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스타들이 인스타그램에 일상을 소개하면서 책을 든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이미지를 심어준다. 이를 의식한 스타들이 어느 순간부터 시집이나 책 사진을 많이 올리고, 어떤 작가를 좋아한다는 말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며 "출판사로서는 당연히 반가운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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