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1990년대 비범한 시재(詩才)를 보였으나, 이른 나이에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박서원(1960∼2012) 시인의 시전집(최측의농간)이 출간됐다.
첫 시집 '아무도 없어요'(1990)와 전성기의 시집 '난간 위의 고양이'(1995), '이 완벽한 세계'(1997), 후기 작품인 '내 기억 속의 빈 마음으로 사랑하는 당신'(1998), '모두 깨어 있는 밤'(2002)까지 다섯 권을 모두 모았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회고에 따르면 박 시인은 시를 배운 적이 없고 습작을 해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누가 시라고 하는 것을 주어서 읽어보았는데, 이런 것을 나도 쓸 수 있겠다 싶어서 썼고, 그걸 투고했더니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실은 당선이 아니라 잡지 '문학정신'이 1989년 박서원의 투고 작품을 수록하며 시인으로 추천했다.
시인은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으며, 희귀 신경병인 기면증에 정신질환을 앓았다. 미성년 시기에 당한 성폭력의 상처를 지녔고, 내내 가난했다고 한다. 이런 곡절 많은 삶과 예민한 감각이 빼어난 시적 언어로 승화했다. 여성에 대한 사회 억압과 모순적 잣대에 저항하는 날 선 목소리도 담겼다.
"깨끗하고 편안한 침대는 악이어서/날마다 밝은 시련으로 몸을 돌리는/더듬거리며 이어가는/아픈 꽃을 보시겠어요?/명성이라든가 낙태한 여자의 부도덕/말고는 할 말이 없는 당신들/회가 동하게 하는/꼽추 춤을 애꾸 춤을 보시겠어요?" ('아픈 꽃을 보시겠어요?' 중)
'난간 위의 고양이'는 그의 재능이 가장 빛났던 시절에 나온 수작으로 꼽힌다.
"그는 난간이 두렵지 않다/벚꽃처럼 난간을 뛰어넘는 법을/아는 고양이/그가 두려워하는 건 바로 그 묘기의/명수인 발과 발톱/냄새를 잘 맡는 예민한 코/어리석은 생선은 고양이를 피해 달아나고/고양이는 난간에 섰을 때/가장 위대한 힘이 솟구침을 안다/그가 두려워하는 건/늘 새 이슬 떨구어내는 귀뚜라미 푸른 방울꽃/하느님의 눈동자 새벽별/거듭나야 하는 괴로움/야옹/야옹" ('난간 위의 고양이' 전문)
시인은 2002년 시집 '모두 깨어 있는 밤'을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이 끊겼다. 다른 소식도 없다가 2016년 여름 시인이 별세했다는 소문이 SNS 등을 타고 돌았다. 신동혁 최측의농간 대표가 나서서 생전 소재지를 수소문한 끝에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 시인은 2012년 5월 10일 세상을 떠나 경기도 한 수목원에 수목장으로 안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벌써 불을 끌/시간이군요.//가만,//드디어 계단에/발소리가 들리는군요./누군가 나를 채워주려/오나 봐요.//그러나 역시 아무도/안 와요./나는 물만 마셔요./차라리/그리움이 그리움을/삭발하고/거울 앞에 설래요." ('아무도 없어요' 중)
황현산 평론가는 "두 시집 '난간 위의 고양이'와 '이 완벽한 세계'는 한국어가 답사했던 가장 어둡고 가장 황홀했던 길의 기록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고 평했다.
516쪽. 2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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