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르프티파리지앵 특파원 의거 당시 현장에…르포기사로 생생히 전해
"키 크고 마른 세련된 회색 옷차림의 한국인…얼굴 피범벅"
"폭발음 처음에 축포인 줄…기자증 들고 뛰어갔더니 일본군대장 얼굴 명주천 덮여"
다른 프랑스 신문들도 윤 의사 의거 주요기사로 보도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지금으로부터 86년 전인 1932년 4월 29일.
25세 청년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인 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축하식장에 잠입, 폭탄을 던져 일제의 수뇌부를 처단했다.
연합뉴스는 윤 의사의 의거 86주년을 앞두고 재불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자 이장규씨(파리 7대 박사과정 재학)의 도움으로 당시 프랑스 언론들을 프랑스국립도서관(BNF) 아카이브에서 찾아봤다.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린 이 사건을 머나먼 프랑스의 신문들도 자세히 다뤘는데, 특히 거사 당시 행사장에 있던 한 프랑스 기자가 경험담을 생생한 르포로 전한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프랑스 일간 '르 프티 파리지앵'(Le Petit Parisien)의 상하이 특파원이었던 조르주 모레스트(Georges Moresthe) 기자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일본의 훙커우 공원 행사 현장에 취재차 직접 참석했다가 우연히 윤 의사의 거사를 목격한 경험담을 이 신문의 1932년 4월 30일자 1면 기사에서 소상히 적었다.
윤 의사가 연단에 있던 일제 수뇌부를 향해 도시락 폭탄을 던져 폭발시킨 직후의 상황을 모레스트는 이렇게 묘사한다.
"(오전) 11시 30분이 조금 지나서 갑자기 큰 폭발음이 들렸는데 우리는 축포의 첫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연단 주위의 사람들이 중심을 잃었다. (중략) 한 사진사가 사진기를 두 손에 든 채 얼굴이 피범벅이 돼 있었다."
축포가 아닌 폭탄 공격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한 모레스트 기자는 아수라장이 된 연단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우리 뒤에서 공원을 빠져나가는 모든 사람이 검문을 당했다. 그때 어떤 공격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내 기자증을 높이 쳐들고 연단으로 뛰어갔다. 시게미쓰(당시 일본 주중공사)가 누워있는 첫 번째 차량과, 시라카와 장군(일본 육군대장)이 누워있는 차량을 마주쳤는데 시라카와의 얼굴에는 명주 천이 덮여있었다."
얼굴에 명주천이 덮인 것으로 묘사된 인물은 일제의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다. 그는 윤 의사의 폭탄에 중상을 입고 12번의 수술을 받았으나 한 달 뒤 사망한다. 마찬가지로 중상을 입은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후에 오른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모레스트 기자는 거사 직후 일본군에 연행되는 윤봉길 의사에 대한 인상도 자세히 묘사한다.
"공원 출구 쪽에 있던 외국공관 무관들이 내게 몇 가지 사실들을 말해주는데 한 젊은 남자를 데려오는 군인들을 봤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밝은 회색의 세련된 차림의 남자였다. 중국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인 같았다. 얼굴은 온통 피로 덮여있었는데 공범 중 하나인 것 같았다"고 했다.
윤 의사는 일본군의 눈을 피해 일부러 세련된 정장을 차려입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같았다'는 표현 역시 이런 정황을 뒷받침한다.
윤 의사로 추정되는 한국인이 거사 후 군중에 의해 린치를 당하는 모습도 그렸다.
"그 한국인은 그를 발기발기 찢어버리려는 군중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군인들이 그를 둘러싸고 군중에게 총검을 들이대야 했다. 이후 차량이 도착해서 의식을 잃은 그를 데리고 갔다."
모레스트 기자는 "지금으로선 범인이 자신을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하는 23세의 한국인이라는 것 외에 모른다"고 덧붙인다. 윤 의사는 거사 당시 한국식 나이로 25세였으니 거의 정확한 정보였던 셈이다.
'르 프티 파리지앵'은 이 르포기사에 '상하이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끔찍한 공격이 있었다'는 제목을 달았다. 부제 중 하나로는 '범인은 테러 조직의 일원'이라고 적시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 언론들은 미국 언론들과 달리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이처럼 '테러리스트'의 행위로 보도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바로 자신들이 제국주의를 창안하고 유지해온 당사국들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일간 '랭트랑지장'(L'intransigeant·'비타협'이라는 뜻)과 르피가로(Le Figaro)는 그러나 윤 의사를 '혁명가'로 표현해 눈길을 끈다.
랭트랭지장은 "한국의 혁명가들은 일본에 어려움을 가중시키기 위해 때를 잘 골랐다"면서 의거가 적시에 이뤄졌음을 강조했고, 보수성향의 르피가로는 "일본 당국에 따르면, 한국의 혁명조직에 의해 이번 음모가 계획됐으며 볼셰비스트(러시아 마르크수주의의 급진좌익파)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제국주의에 반대 목소리를 높여온 프랑스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L'Humanite)는 일본이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인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할 것을 우려했다.
이 신문은 1932년 5월 1일 자 6면 기사에서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의 노동자·농민·학생들을 봉기하게 한 자신의 극악한 압제에 맞서 표출된 분노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데 이용하려 한다"고 했다.
일간 옴므리브르(Homme Libre)도 윤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칭하긴 했지만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당의 일원"이라면서 의거가 대한 독립의 당위를 알리기 위한 것임을 암시했다.
yongla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