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 잃은 작가의 고독한 여정 '문맹'

입력 2018-05-1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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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 잃은 작가의 고독한 여정 '문맹'
아고타 크리스토프 자전소설 출간
담백한 문체와 울림 있는 이야기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로 국내 독자들에게 알려진 헝가리 출신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1935∼2011)의 자전적 소설 '문맹'(한겨레출판)이 처음 번역돼 나왔다.
제목이 시사하듯 작가 자신이 모국어를 잃고 문맹이 된 뒤 이를 극복하고 다시 작가로 서게 된 여정을 담았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이 작품 역시 작가 특유의 문체가 매력적이다. 자신의 고된 인생 역정을 그대로 옮기면서도 넘치는 묘사 없이 절제된 어조로 꾹꾹 눌러쓴 노력이 엿보인다. 이런 문체 덕분에 이야기가 주는 울림이 배가하는 느낌이다.
1935년 헝가리의 작은 국경마을에서 태어난 작가는 십대부터 남다른 고난을 겪어야 했다. 네 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해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 총명한 아이였으며, 어린 동생에게 "너는 주워 온 아이"라며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지어낸 당돌한 아이였지만, 아버지를 잃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며 밝은 기운을 잃는다. 생계를 위해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작가는 어쩔 수 없이 학교 기숙사에 들어간다. 그 시절 어머니와의 짧은 만남을 회고하는 부분에는 그 시절 아픔이 잘 드러난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게 할 말이 없다. 나는 신발을 수선 맡겼고, 수선공이 내게 외상을 주었으며, 그에게 최대한 빨리 갚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어머니의 낡은 원피스, 쥐약으로 더러워진 장갑을 보고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나는 어머니에게 입을 맞추고, 나가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43쪽)
그런 우울한 나날들에도 유일한 탈출구는 글쓰기였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스물한 살밖에 안 되는 젊은 나이에 모국을 등지면서 모국어를 잃는다.



이 책에서 작가 자신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당시(1956년) 세계사의 격변기 헝가리에 닥친 외세 침략으로 많은 헝가리인이 탄압받았다고 한다. 작가는 정치적으로 연루된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린 아기를 데리고 헝가리 국경을 넘어야 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이다.
"나의 어린 딸은 아이 아빠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고 나는 두 개의 가방을 들고 있다. 둘 중 한 가방에는 젖병과 기저귀, 아기에게 갈아입힐 옷이 있고 다른 가방에는 사전들이 들어 있다. 우리는 요세프(월경 안내인)의 뒤를 따라 약 한 시간가량 침묵 속에 걷는다. 거의 완벽한 어둠이다. (중략) 우리는 숲을 걷는다. 오랫동안. 너무 오랫동안. 나뭇가지들이 우리의 얼굴을 할퀴고, 우리는 구멍에 빠지고, 낙엽이 우리 신발을 적시고, 우리는 뿌리에 걸려 발목을 접질린다." (69∼70쪽)
그렇게 오스트리아를 거쳐 들어선 스위스에서 그는 행복해졌을까. 한 시계 제조 공장에서 일하고 집에 와서는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매일 똑같은 생활을 작가는 '사막'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이곳에 오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이 이런 것, 활기 없는 작업의 나날들, 조용한 저녁들, 변화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희망도 없는 부동의 삶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중략) 어떻게 그에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짧은 프랑스어로, 그의 아름다운 나라가 우리 난민들에게는 사막, 사람들이 '통합'이라든지 '동화'라고 부르는 것에 다다르기 위해서 우리가 건너야만 하는 사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90∼91쪽)
스위스에 정착한 5년 뒤에야 작가는 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하고 '읽고 쓰는 법'을 배운다. 작가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지적하며 그것과 싸우겠다는 다짐으로 이 책을 끝맺는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중략)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112∼113쪽)
국내 문단에서 주목받는 젊은 소설가 백수린이 불문학 전공을 살려 프랑스어 원작을 우리말로 옮겼다.
mi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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