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상주 백화산 '호국의 길'

입력 2018-06-10 08:01  

[연합이매진] 상주 백화산 '호국의 길'
물소리 들으며 걷는 호젓한 천년 옛길

(상주=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호국의 길'은 경북 상주와 충북 영동의 경계에 있는 백화산(993m)을 오른쪽으로 두고 상주 옥동서원에서 영동의 고찰 반야사까지 구수천(석천)의 여덟 개 여울을 따라 걷는 5㎞ 남짓의 호젓한 길이다.
초반에 옥동서원에서 백옥정까지의 오르막만 넘으면 돌길, 흙길, 톱밥길, 나무 데크로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줄곧 나무 그늘이어서 따가운 햇볕도 피할 수 있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편이다. 깊은 골짜기의 물소리, 새소리, 흙냄새, 나무 냄새, 바람을 오롯이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백화산 '호국의 길'에는 이야기가 많다. 신라 태종 무열왕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도모한 전초기지인 금돌성과 고려 승병이 몽골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저승골, 고려 악사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몸을 던진 임천석대가 있다. 임진왜란 때도 의병들이 활동하던 곳이어서 '호국의 길'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다.
그러나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출렁다리와 돌다리를 건너고, 암벽 풍경에 감탄하며 걷다 보니 '구수천 천년 옛길'이라는 이름에 더 마음이 간다. 옛사람들이 이 마을과 저 마을을 오갈 때 이용한 지름길이었다.



◇ 황희 영정 모신 옥동서원

시작점인 상주의 옥동서원을 먼저 둘러본다. 옥동서원(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2호)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7명의 국왕을 모시며 조선 초 유학의 기반을 마련한 명재상 방촌 황희(1363∼1452년)를 추모하는 서원이다.
1518년 건립해 황희의 영정을 모신 백화서원이 효시다. 황희 외에 전식(全湜, 1563∼1642년), 황효헌(黃孝獻, 1491∼1532년), 황뉴(黃紐, 1578∼1626년)를 배향(配享·신주 모시기)하고 이들의 향사(享祀, 제사)가 전승되고 있다.
1789년 옥동서원으로 사액(임금이 사당·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현판을 내리는 일)을 받았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훼손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문루인 청월루와 강당인 온휘당, 사당인 경덕사가 일렬로 늘어서 있고, 학생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없다. 이는 강학 기능이 약화하고 향사 기능이 강화된 17∼18세기 서원 건축의 특징이다.
황희 선생 영정을 포함해 책판과 고문서, 현판 등 많은 기록유산이 있다. 현재 사당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마당에 잡초가 자라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지만 그 운치는 놓치기 아깝다.



옥동서원을 나와 산길로 들어서면 10분 남짓 오르막길이다. 백옥정에 오르면 잠시 쉬며 땀을 식힐 수 있다. 옹기종기 모인 마을과 포도밭, 굽어 흐르는 구수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첫 번째 고개만 넘으면 끝까지 평탄한 길이다. 흙길과 돌길을 지나고 소나무밭을 지날 땐 솔잎이, 질척거리는 곳엔 톱밥이 깔려 있어 폭신하다. 바위로 끊어진 길에는 나무 데크가 놓였다.
옆으로 따라오는 물은 금강으로 합쳐진다. 상주에서는 구수천, 영동에서는 석천으로 부른다. 최근 내린 큰비로 물소리가 제법 세찼다. 물길 양쪽을 잇는 돌다리 중 한 곳은 물에 잠겼다.
걸을수록 골이 점점 깊어지면서 휴대전화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길 중간쯤 밤나무 단지가 있는데 사유지가 아닌 곳에도 밤나무가 가득하다. 가을에 오면 떨어진 밤을 줍느라 정신이 없다고 동행한 문화관광해설사는 전했다. 밤나무골을 지나면 출렁다리다. 구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규모가 작지 않다. 세차게 흐르는 물 위로 출렁이는 다리 위에 섰을 때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흠칫할 만하다.



◇ 휴대전화도 잠드는 깊은 골

바위에 새긴 빨간색 글씨만큼이나 섬뜩한 저승골은 1254년 침입한 몽골군이 고려 승병들에게 쫓겨 떼죽음을 당한 곳이다. 고려사는 '패퇴한 몽골군이 남하하며 20만6천800여 명을 사로잡았고 살육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거쳐 간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화산 최고봉인 한성봉(恨城峰)의 이름도 몽골 장군 차라대가 물러가며 '한을 남긴 성과 봉우리'에서 유래하고, 방성재는 몽골군이 방성통곡하며 퇴각했다 하여 구전된 지명이라 한다. 저승골에 홀로 들어갔다 헤맨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지나쳤다.
주변을 병풍처럼 두른 절벽인 난가벽을 지나면 임천석대가 나온다. 고려의 악사였던 임천석은 고려가 망하자 낙향해 이곳 절벽 위에서 거문고를 켜며 충절을 지켰다. 태종이 그의 재능을 알고 부르자 거절하고, 다시 부르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징검다리를 지나 부처바위가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부처의 모습은 알아보지 못했으나, 좋은 자리에 놓인 평상에 앉아 숲 바람을 맞으며 준비한 간식을 먹었다. 출발점에도 도착점에도 마땅한 식당이나 가게가 없고, 교통편 등을 고려해 왕복하게 되면 4시간 가까이 걸리니 도시락을 준비하는 게 좋다.
반야사 옛터를 지나면 오른편 산기슭에 너덜겅(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비탈)이 나온다. 이곳저곳 바위 위에는 돌탑이 쌓여있다. '반야사 호랑이'라는 안내판이 있는데, 다리를 건너 반야사 경내에서 바라보면 그 정체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 무학대사 지팡이가 쌍배롱나무로

이 길의 종착점인 반야사는 구수천이 태극 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며 연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곳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원효, 의상 등이 세웠다는 신라 시대 창건 설화가 여럿 있으나, 신라의 무염국사(800∼888)가 당시 거찰인 심묘사에 머무를 때 사미승 순인을 보내 못의 악룡을 몰아내고 못을 메워 절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국전쟁 때 불탄 것을 20∼30년 전부터 다시 중건하고 있어 옛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마당에 들어서면 우선 반야사 호랑이부터 제대로 확인한다. 산에서 흘러내린 돌들이 나무와 경계를 이뤄 만들어낸 모양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호랑이의 모습을 꼭 빼닮았다. 특히 오른쪽에 잔뜩 치켜세운 꼬리가 두드러진다.
그다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극락전 앞에 삼층석탑(보물 1317호)과 함께 있는 500년이 되었다는 배롱나무(백일홍 나무) 두 그루다. 조선 건국 당시 무학대사가 주장자(지팡이)를 꽂아 둔 것이 둘로 쪼개져 쌍배롱나무로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반야(般若)라는 절 이름은 조선 세조와 문수보살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고질병인 피부병으로 고생했던 세조가 신미대사의 주청으로 반야사를 중건하고 회향법회에 참석했을 때, 문수동자가 나타나 세조를 절 뒤쪽 계곡인 영천으로 이끌어 목욕을 권했다. 목욕한 뒤 피부병이 낫자 감격한 세조가 지혜를 뜻하는 반야라는 이름을 손수 써 하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필(御筆)은 남아있지 않다.
영천 옆 절벽에 문수보살이 올라 주변을 둘러봤다는 망경대(望景臺)가 있고, 그 꼭대기에 위태롭게 올라앉아 있는 것이 문수보살을 모신 문수전이다. 문수전에 가려면 가파른 절벽을 따라 만든 계단을 올라야 하지만, 백화산과 구수천, 걸어온 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광이 수고로움을 보상한다.



◇ 달도 머물러 가는 월류봉

나오는 길에는 달도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月留峰)도 들러볼 만하다. 위로는 깎아 세운 듯한 여섯 개의 봉우리가 이어지고, 아래로는 금강 상류의 한 줄기인 초강천이 굽어 흐른다.
월류봉을 비롯한 주변의 8개 절경을 한천 8경이라 부른다. 한천(寒泉)은 우암 송시열이 월류봉이 잘 보이는 곳에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쳤던 한천정사에서 따왔다. 이 일대는 지금은 없는 신라의 거찰 심묘사가 있던 곳으로, 조선의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은 심묘사의 사내팔경 중 으뜸으로 월류봉을 꼽고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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