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서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
1960년대 예술가·공학자 협업체와 그 유산 돌아보는 전시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24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에 설치된 나무 구조물 주변에 수십 명이 모여들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내 탄성이 터졌다. 구조물 가까이에 선 누군가 가슴에 청진기를 대자마자 분화구 용암이 솟구치듯, 구조물 내부에서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장 뒤피 '심장박동 먼지: 원뿔형의 피라미드'는 관람객 심장박동을 청진기로 포착, 그 음향을 작품 중앙 고무막을 통해 증폭시켜 먼지를 일으킨다. 특수 안료를 활용했기에 먼지가 붉은 피처럼 보인다.
무려 50년 전 제작된 사실을 알고 나면, '심장박동 먼지'는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으로 보인다. 예술가 장 뒤피가 1968년 공학자 랠프 마르텔, 해리스 하이먼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이 작품은 그해 E.A.T 공모전에서 예술과 과학 협업을 보여주는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 선정됐다.
E.A.T는 1966년 미국 뉴욕에서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로버트 휘트먼 등 예술가와 벨 연구소 빌리 클뤼버, 프레드 발트하우어 등 공학자가 함께 만든 협의체다. 26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막하는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는 예술과 과학기술 협업을 꾀한 E.A.T. 작품 33점과 아카이브 100여점이 나왔다. 박덕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말처럼 "어떻게 50년 전에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말이 절로 나오는 작품들이다. 이들은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력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관람객 참여를 유도한다.
장 팅겔리 '뉴욕 찬가'(1960)는 뉴욕 일대에서 수거한 온갖 폐품과 오물로 만든 길이 7m, 높이 8m 작품이다. 스스로 피아노를 치고 그림을 그리고 증기를 내뿜던 이 '요물'이 당시 퍼포먼스로 자멸한 탓에 기록 영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점은 두고두고 아쉽다.
스테인리스 테이블 표면에 얼음이 스스로 동결과 융해를 반복하는 한스 하케 '아이스 테이블'(1967), 비디오아트 신기원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백남준 '자석 TV'(1995년 재제작)도 나왔다. 앤디 워홀과 빌리 클뤼버가 만든 헬륨 풍선 '은빛 구름'(1966)도 서울관 천장을 마음껏 부유하며 전시 개막을 기다리는 중이다.
박덕선 연구사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단순히 예술가들이 과학기술을 이용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공학자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예술가들이 품었던 생각이 확장됐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전시 하이라이트는 1966년 10월 뉴욕 69기병대 무기고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작업 '아홉 번의 밤: 연극과 공학'이다. 수십 명의 예술가와 공학자가 아흐레 동안 10개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는 최근 미술관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다원예술' 모태가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E.A.T는 견고한 벽을 허물고 예술 폭을 넓혔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한때 6천여 명이 참여한 E.A.T는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포스트모던 안무가 머스 커닝햄 등 다양한 분야 인사들과 교류하며 더 많은 성취를 일궈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은 지금, 이들의 활동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E.A.T. 멤버로 활동한 줄리 마틴은 인터뷰에서 "예술가와 공학자간 협업이 이제는 문화 일부가 됐다. 그러나 E.A.T.가 활동하던 1960년대에는 예술가가 기술과 산업에 접근하는 데 구조적 장애가 만연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예술과 기술의 협업 역사를 알리는 것, E.A.T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라면서 "이러한 노력이 예술과 기술에 대한 담론을 활성화하고 더 큰 가능성을 발견하고 진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E.A.T. 창립 멤버인 로버트 휘트먼이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서울-뉴욕 아이들 지역 보고서'(2018)도 감상한다. 서울과 뉴욕에 사는 10대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서로 소통하는 퍼포먼스다.
전시는 9월 1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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