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카는 안 마시고…뭔가에 압도됐다" 횡설수설
(서울=연합뉴스) 이동경 기자 = 공포 정치로 악명높은 러시아 최초의 황제(차르) 이반 4세(1530~1584)가 죽어가는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을 그린 명화가 한 젊은 러시아 남성에 의해 훼손됐다.
사건은 지난 25일(현지시간)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대가인 일리야 레핀(1844∼1939)이 그린 '폭군 이반과 아들, 1581년 11월16일'이 전시된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일어났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27일 보도했다.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남부 보로네시 시(市) 출신인 37세의 한 남성이 미술관이 문을 닫기 직전에 경비원들을 지나쳐 작품에 접근, 관람객의 근접을 막는 금속 안전봉을 뽑아 두꺼운 진열 유리를 향해 내리쳤다.
유리가 박살나면서 캔버스에 세 군데 구멍이 생기고 그림 테두리도 파손되는 피해를 보았으나, 그림에서 이반과 아들의 얼굴이나 손 부분 등은 찢어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미술관측은 안도했다.
경찰에 체포된 이 남성은 "난 보드카는 마시지 않고, 어떤 것에 완전히 압도됐다"면서 "그림을 보러왔다. 나가려고 하다가 미술관에 있는 뷔페에 들러 보드카 100g을 마셨다"며 다소 횡설수설하는 진술을 했다.
이 그림은 이반 4세가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아들을 팔로 감싸 안고 슬퍼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잔악무도한 통치의 대명사인 이반 4세는 수많은 정적을 처단하고, 후계자인 아들까지 죽인 것으로 알려졌다. 며느리의 복장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아들의 머리를 몽둥이를 내리쳤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림을 훼손한 남성은 자신이 심각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최고 3년의 징역형과 300만루블(약 5천100만원)의 벌금을 물게 될 처지에 놓였다고 러시아 국영 RIA 통신이 보도했다.
이 남성이 그림을 훼손한 이유가 그림에서 묘사된 장면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는 일부 러시아 매체의 보도도 나왔다.
이반 4세에 폭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기를 거부하는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그림이 묘사하는 장면에 대한 논쟁을 벌이면서 그림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 전시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미술관측은 거부하고 있다.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이반 4세가 근대 러시아의 기초를 다졌으며, 권력 집중을 통해 강한 러시아를 구축했다고 재조명하고 있다.
레핀은 1881년 당시 황제 알렉산더 2세가 피살된 것에 영감을 얻어 1885년 이 그림을 완성했고, 수집가 파벨 트레티야코프가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에 전시했으나 알렉산더 3세가 한동안 전시를 금지하기도 했다.
미술관측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수년에 걸쳐 그림을 원상 복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그림은 1913년에도 정신 질환이 있는 남성이 칼을 휘둘러 훼손된 적이 있지만, 당시 생존해있던 작가 레핀이 직접 복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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