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반세기 혁신에 글로벌무대 주연급 성장 불구 '최악 암흑기' 명암
국내에선 압박에 '몸사리기', 해외에선 경쟁 대응 '보폭 넓히기'
(서울=연합뉴스) 이승관 기자 =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나온 이건희 삼성 회장의 '일갈'은 경영의 중심을 양(量)이 아닌 질(質)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고, 결과적으로 명실상부한 '글로벌 삼성'의 밑거름이 됐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불리는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이처럼 '80년 삼성사(史)'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기억되지만 25주년을 맞는 오는 7일 별다른 기념행사는 없는 것으로 4일 알려졌다.
복수의 삼성 계열사 임원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특별한 행사 없이 조용하게 보낸다는 계획인 것으로 안다"면서 "최근 검찰수사 등 여러 상황을 감안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삼성은 2014년 이 회장의 입원 전까지만 해도 매년 이날 신경영 기념식을 열었다. 이후 2015년에는 사내 방송을 통해 특집 다큐멘터리를 선보였고, 2016년에는 사내 인트라넷에 이 회장의 어록을 띄웠다.
그러나 지난해 이 회장의 와병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수감까지 겹치면서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한 탓에 조촐한 행사마저 열리지 않았고, 이 부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올해도 이런 분위기는 이어질 전망이다.
그룹 안팎에서는 대규모 기념행사와 전 계열사 임직원에 대한 특별격려금 지급 등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던 20주년(2013년)만큼은 아니지만 '사반세기'를 맞아 뜻을 되새기는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분위기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축 행사를 여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재계에서는 삼성이 주력 계열사들의 전반적인 경영실적 호조와 글로벌 입지 확대 등에도 불구하고 국내 상황만 보면 창업 이후 최악의 '암흑기'를 맞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이 회장의 오랜 와병과 이 부회장의 재판은 '기본 악재'가 됐고, 노조 와해 의혹과 작업환경보고서 공개 논란, 재벌개혁 압박, 근로시간 단축, 부정적인 여론 등으로 연일 '난타'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회계부정 논란, 삼성증권의 배당오류 사태까지 겹치면서 올해 들어 수사당국의 압수수색만 10여차례 받았다.
삼성은 이런 전방위적인 '압박'에 몸을 사리는 모습이다. "맞설 수도 없고 맞서지도 않을 것"이라는 계열사 고위 임원의 말은 이런 분위기를 감지케 한다.
삼성SDI의 삼성물산 지분 매각, 삼성생명과 삼성화재의 삼성전자 주식 처분,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 직원 직접 고용, 선택적 근로시간제 시행, 삼성언론재단의 언론인 지원 핵심사업 중단 등이 대표적 사례다.
대신 삼성은 삼성전자를 필두로 해외에서 '이건희식'의 공격적 혁신경영을 시도하며 보폭을 넓히고 있다.
'선봉장'은 역시 새 총수인 이재용 부회장이다. 지난 2월 초 석방 이후 해외 출장만 3차례나 떠난 것은 상징적 행보로 여겨진다.
국내 악재에는 위축되고 무기력한 모습이지만 중국의 '반도체 굴기', 미국의 통상 압박 등 해외 도전에는 '신성장 동력 발굴'이라는 화두를 내걸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영국, 캐나다, 러시아에 인공지능(AI) 연구센터를 잇따라 개소한 데 이어 대만과 카자흐스탄에 각각 20번째와 21번째 '삼성 뉴스룸'을 개설했고, 해외 파운드리 포럼을 통해 반도체 신기술 로드맵을 선보인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받아들여진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최근 행보는 국내보다는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준다"면서 "이재용식 신경영은 '글로벌 초일류'를 넘어 '글로벌 초격차'를 지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업으로서 실적과 성과가 우선이겠지만 비판 여론 등에 대한 자성을 토대로 가치와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면서 거듭날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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