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정부가 도소매점이나 음식점이 100년을 이어갈 수 있도록 '백년가게'를 육성한다고 한다. 30년 이상 된 점포나 음식점 가운데 전문성, 제품·서비스, 마케팅 면에서 혁신적인 소상인을 발굴해 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백년가게로 선정한다는 것이다. 올해 목표는 100여 개고 향후 업종도 확대하고 규모도 늘릴 계획이다. 우리나라는 자영업자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 창업·폐업이 악순환 한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백년가게 육성방안은 바람직하고 참신해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서둘러야 할 게 임차상인 보호책이다.
최근 서울 압구정동 거리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궁중족발'을 운영하는 김 모 씨가 건물주 이 모 씨를 찾아가 둔기를 마구 휘두른 것이다. 건물주 이 씨는 큰 상처를 입었고, 족발집 김 씨는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됐다. 발단은 임대료에 있었다. 서촌은 김 씨가 20년 넘게 장사를 해온, 오랜 삶 터였다. 2009년에 차린 족발집은 인근에 맛집으로 소문나면서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2016년 건물주가 바뀌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건물주 이 씨는 월세를 그전보다 4배가 넘는 1천200만 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김 씨의 항의에도 이 씨는 "싫으면 나가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명도소송을 제기했다. 법에 기댈 수 없었던 김 씨는 끝내 둔기를 집어 들었다.
현행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은 임차인의 계약갱신요구를 임대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초 임대차 계약으로부터 5년까지만 이러한 '계약갱신요구권'을 보장한다. 김 씨는 궁중족발을 차린 지 이미 7년이 넘은 상태여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제2, 제3의 궁중족발 비극은 도처에 잠재돼 있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 탓이다. 이 용어는 낙후됐던 구도심이 활성화하면서 주거비용이나 상가 임대료가 급격히 올라 원주민과 상인들이 다른 곳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이른다.
궁중족발이 자리한 서촌은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인 사례다. 한적하고 조용했던 서촌의 상권을 일군 건 이 지역 상인들이었으나 그 과실은 부동산업자나 건물주의 차지다. 서촌의 상권이 뜨면 뜰수록 상승한 상권가치를 건물주가 독식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서촌뿐 아니라 서울의 경리단길, 이대 앞길, 해방촌 등이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인 지역들이다.
건물 임차인의 각종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은 20대 국회에서 23건이나 발의됐으나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대부분의 개정안은 임대차보호 기간을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임대료와 보증금을 인상할 경우 10%를 넘지 못하도록 하자는 안건도 있다고 한다. 궁중족발 사건 이후로 일부 국회의원들이 시민단체와 함께 임대차보호법 개정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부도 백년가게 육성과 함께 임대차 분쟁조정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임차상인 보호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뒤늦게 부산이다. 임차상인 보호 대책이 없는 백년가게 육성은 허울 좋은 전시행정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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