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덴마크 실존주의 사상가 키르케고르는 1849년 그의 대표작 '죽음에 이르는 병'을 출간한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그의 사상을 단답식으로 압축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은 곧 '절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절망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이 물음에 키르케고르는 '자기 자신과 연관되는 관계가 분열하고 부서져 버리면 절망이 시작된다'고 답했다.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의 장편 데뷔작 '오 루시'는 현대인의 위축된 데다 위선적이고 분절된 관계를 파고드는 영화다.
주인공 세츠코는 43살 미혼 직장 여성. 직장에서 그녀는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다. 하나뿐인 언니와는 의절한 지 오래고 취미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영화 보는 정도다.
적당히 숨죽이고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던 세츠코는 조카 미카로부터 영어회화 학원에 대신 다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학원비를 선결제했는데 환불을 요청하니 환불은 불가능하고 대신 수강자를 변경할 수는 있다고 했다는 것. 결국, 세츠코가 수업을 듣고 대신 수업료를 자기에게 달라는 요구다.
조카에게 등 떠밀려 회화 수업에 참석한 세츠코는 꽃미남 영어강사 존을 만나게 된다. 존은 세츠코에게 가발을 씌우고 '루시'라는 영어 이름을 붙여준다.
세츠코는 달라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존에게 색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존은 미카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미카의 어머니이자 세츠코의 언니인 아야코는 외국인과 야반도주한 딸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고 세츠코는 겉으로는 미카를 찾아, 속으로는 존을 찾아 아야코와 동행한다.
'오 루시!'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소지가 다분하다. 누군가에게는 미성숙한 어른 세츠코의 성장영화일 수 있고, 누군가는 한없이 외로운 세츠코에게 동질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혹은 세츠코가 존을 만나 위안을 얻고 자신감을 찾아가는 데 대리만족을 경험할 수도 있겠다.
반면 루시와 존, 미카, 아야코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관객도 있을 법하다. 어찌 보면 이들은 모두 이기적이고 상식의 범주에서 조금씩 벗어난 사람들이다.
외로움에 지쳤다 한들 바닥까지 떨어지고 마는 세츠코의 모습은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라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존, 미카, 아야코와의 관계가 모두 틀어지고 직장에서마저 벼랑 끝으로 내몰렸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절망은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명제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2010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테라지마 시노부가 세츠코 역을 맡았다. 일상에 찌든 중년 여성이 새로운 자신과 욕망에 눈 뜨고 다시 절망에 빠져드는 과정을 열연했다.
꽃미남 영어강사 '존'은 실제로도 꽃미남인 조시 하트넷이 연기했다. 한동안 영화 출연이 뜸했던 그가 일본영화에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영화 속 존은 어딘가 나사 빠진 모습이지만 하트넷은 그런 모습조차도 매력적으로 소화했다.
미카 역은 '데드풀2'에서 초능력자 유키오 역으로 출연해 주목받은 쿠츠나 시오리가 맡았고, 아야코 역은 일본의 연기파 배우 미나미 카호가 캐스팅됐다.
비중이 크진 않지만 세츠코의 영어 회화반 동료인 타케시 역으로 야쿠쇼 코지가 출연한다. '쉘 위 댄스'의 춤바람 난 아저씨로 국내 관객에게도 익숙한 배우인 그의 일본 내 입지는 우리 국민배우 안성기와 비견될 만하다. 28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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