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배, 4·3 역사화 연작 모아 학고재서 26년 만에 전시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여기 소녀가 손에 쥔 것이 고사리예요. 옆에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여자도 있고, 이쪽에는 봉분을 살피는 사람이 있고…."
화가 강요배(66) 눈길이 캔버스 위를 찬찬히 훑었다. 캔버스 아래쪽 절반을 차지한 산자락에는 사람이 꽤 많이 모여들었다. 삼삼오오 자리를 잡은 이들은 한창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이따금 먼데 산봉우리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강요배 1992년 작 '한라산 자락 사람들'은 이렇듯 한갓진 풍경 너머로 70년 전 제주 비극을 증언한다. 많은 제주민이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거부하며 투표소 대신 산자락에 올랐고, 제주 선거구 3곳 중 2곳 선거는 무효가 됐다.
낙인 찍힌 섬에는 계엄령이 내려졌고 바다는 봉쇄됐다. 심상치 않던 공기에는 곧 피비린내가 섞여들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입을 닫았다. 강요배가 태어난 1952년 무렵에도 제주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반동분자'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지켜본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도 따라 짓지 않을 것 같은 '요배'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맨정신일 때는 생각조차 안 했지. 알아서 좋을 게 없었으니깐. 다 쉬쉬했어."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만난 강요배는 '어릴 적 집에서라도 4·3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느냐'는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울에서 민중미술 선봉에 선 작가는 1988년 현기영 소설 '바람 타는 섬' 삽화를 맡으면서 고향의 비극과 비로소 마주했다. 그는 이듬해부터 3년간 제주 4·3 작업에 매달렸고, 이 작품들을 모아 1992년 기획전 '제주 민중항쟁사'를 열었다.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는 '메멘토, 동백'은 강요배의 제주 4·3 역사화를 한 자리에 모은 전시다. 1989~1992년 제작 작품 50여 점뿐 아니라 1992년부터 매년 한 점씩 4·3을 기리며 그린 '동백 이후' 10여 점으로 채웠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동백꽃 지다'(1991)는 고개 꺾인 홑동백 뒤로, 짓이겨진 꽃잎인지 핏자국일지 모를 현장을 전한다. 불지옥을 담은 '천명'을 지나던 작가는 '선생님이 나고 자란 마을도 피해를 봤느냐'는 물음에 "안전하게 지나간 마을이 없었다"고 답했다. "중간산 마을은 불탔어, 시뻘겋게. 300여 마을인가"라고 말하던 작가는 잠깐 대화를 멈추고서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갤러리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명치 끝이 아린다. 작가 또한 작업하다가 수없이 울었다고 고백했다. "맨정신으로 할 수 없었어요. 건조하게 짚을 수도 없었고요."
작가는 가장 의미 있는 작품으로 '한라산 자락의 사람들'을 꼽았다. 작품은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거부하며 한라산 자락에 끊임없이 모여드는 사람들 행렬을 통해 분단이 아닌 통일된 한반도를 꿈꾸는 사람들의 바람을 담았다"(미술사학자 박계리)는 점에서 요즘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작가는 "남북문제가 잘 풀리고, 아시아 문제가 잘 풀리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삼국 시대 이후 우리가 분단된 적이 없지 않느냐"라고 힘주어 말했다.
제주 4·3 수식어가 폭동, 봉기, 사건, 항쟁 등으로 바뀌는 사이 강요배 작업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화로 자리매김했다. 26년 만에 이들을 모아 다시 전시를 열게 된 작가는 한껏 몸을 낮췄다.
"이 작품들은 강요배가 공부한 바로는, 보고한 바로는 이렇습니다 하는 하나의 보고서인 셈이죠. 100% 정확하게 짚었다 할 수 없어요. 사실 내가 겁 없이 하는 게 아닌가 걱정도 많았어요. 그래도 아직 크게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들은 없으니……." 작가의 움푹 팬 볼우물에 처음으로 살짝 웃음이 어렸다.
학고재갤러리 전관을 쓰는 이번 전시는 7월 15일까지.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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