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통 협상가의 '로키'…협상 불확실성 커 시진핑에 부담 전가 우려
(상하이=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 중국의 국가적 난제를 해결해왔던 '소방대장'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이 최근 발발한 미중 무역전쟁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에서 퇴임한 왕치산은 지난 3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신임 속에 인사원칙을 깨고 국가부주석으로 재등장할 때만 해도 그가 앞으로 외교·경제 현안의 중심에 있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주류를 이뤘다.
국가부주석에 공식 임명되기 전 그는 테리 브랜스테드 주중 미국대사와 당시 백악관 수석전략가였던 스티브 배넌을 접견하며 향후 미중관계를 조율할 핵심 인사로 지목됐었다.
그가 그간 중국의 난제를 처리했던 '특급 소방수'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는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2년 중국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대유행 등의 위기를 수습했고 2013년부터는 시 주석의 반부패 사정 작업을 주도했었다.
그는 또 미국내 인맥이 적지 않은 '미국통'으로 미국과의 협상 경험도 풍부하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부총리를 지낼 당시 미국과의 전략경제 대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왕 부주석은 미중 무역전쟁의 공식적인 발발에도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고 미중 무역전쟁에 대해 제대로 입장을 밝히지도 않고 있다. 관세발효전 미중 양국의 물밑협의로 왕 부주석의 투입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결국 설에 그치고 말았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10일 왕 부주석이 최근 미중 양국의 무역전쟁과 논쟁에서 별다른 공식 역할을 맡지 않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두드러진다고 평가했다.
왕 부주석이 최근 중국의 외교·경제 현안에서 전면에 나타나지 않고 로키(low-key)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의 정치적 위상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고 여전히 핵심 지도자라는 사실은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의 부재가 미중 관계에 대한 나쁜 조짐을 의미한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하지만 로이터통신은 서방의 한 외교관을 인용해 중국 최고지도부가 왕 부주석이 미중 협상에 참여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미중 무역전쟁의 앞날이 지나치게 불확실해 협상 전면에 나서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워싱턴에서 이뤄진 2차 무역협상의 합의 결과에 불만족을 토로하고 관세강행 방침을 밝혔을 당시 중국측 협상대표인 류허(劉鶴) 부총리가 난처한 입장에 처한 점을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한 소식통은 "왕 부주석은 시 주석의 '오른팔'로 직접 대면 보고가 이뤄지는 사이"라며 "왕 부주석이 미중 협상 과정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이는 시 주석의 개인 실책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총리는 난처해져도 되지만 부주석이 그렇게 되면 안된다는 게 중국 지도부의 입장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무역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기 위해서는 중국은 미국에 큰 양보를 해야 하는데 현재 중국내 여론을 주전파가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왕 부주석이 미국에 대한 양보로 타협을 시도한다면 자국내에서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스콧 케네디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연구원은 "왕치산이 미중 양국 사이에 거래가 이뤄지고 합의가 지켜질 것이라는 더 큰 확신이 있기 전까지는 비행기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미국의 전략에 대한 중국의 파악이 미흡한 점도 왕 부주석이 등장하기가 어려운 요인일 수 있다. 중국 당국은 현재 무역전쟁에서 미국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다.
특히 미국 무역협상팀이 자유무역을 선호하는 온건파와 보호무역을 내세우는 강경파로 갈라진 상황은 중국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대목이다.
결국 중국이 미국의 전략적 의도에 대한 파악을 끝내고 양국간 협상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면 왕 부주석이 미중 무역협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왕 부주석이 미중 무역현안에 나타나게 된다면 이는 곧 미중간 타협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다는 관측이다.
joo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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