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과 시간이 빚어낸 생태낙원
(고창=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댐이 들어서며 저수지가 생기고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30여 년. 수몰되고 버려진 경작지와 사람이 살던 마을은 총 860여 종의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낙원으로 변모했다. 원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무관심과 시간이었다.
1981년 전남 영광에 한빛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며 발전용 냉각수를 공급하기 위한 운곡댐이 건설됐다. 댐으로 물길이 막히자 커다란 저수지가 생기면서 운곡리와 용계리가 수몰됐고 터전을 잃은 주민들은 고향에 작별을 고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3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곳에는 원시 생태계가 생겨났다. 이렇게 형성된 운곡습지는 2011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고, 같은 해 람사르습지로 등록됐다. 운곡습지에는 수달, 황새, 삵, 담비, 구렁이, 새호리기, 팔색조, 붉은배새매, 황조롱이 등 멸종위기 야생동식물과 천연기념물이 원시의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 열대 밀림 같은 탐방로
운곡습지에는 4개의 생태탐방 코스가 조성돼 있다. 운곡습지를 보려면 고인돌유적지 탐방안내소에서 출발해 습지를 관통하는 1코스(왕복 7.2㎞)나 친환경주차장 탐방안내소에서 시작해 운곡저수지를 한 바퀴 도는 2코스(9.6㎞)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고인돌유적지 탐방안내소에서 탐방을 시작했다. 싱그러운 초록빛 풀밭에 고인돌이 점점이 박혀 있는 비탈길을 올라 나무가 하늘을 가릴 듯한 시원한 숲길을 지나면 탐방로가 시작된다. 나무 데크 탐방로는 어른 한 명이 지날 정도 폭이 좁다. 환경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한 배려다. 데크 아래 있는 식물도 빛을 받을 수 있게 데크 디딤판 나무의 간격을 일정하게 띄워놓았다.
탐방로 주변은 열대의 밀림 속에 있는 듯 울창하다. 탐방로 주변은 초록빛이 빽빽할 뿐 습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 탐방로 주변은 물이 어른 가슴 높이까지 차오르는 습지다. 자세히 보면 운곡습지의 주요 수종인 버드나무 주변을 수질 정화 식물인 고마리가 한가득 뒤덮고 있다.
조용호 자연환경해설사는 "구름이 많이 끼는 골짜기여서 운곡이란 이름이 붙었다"며 "습지 아래를 유문암이 떠받치고, 유문암이 풍화된 점토가 쌓여 물이 잘 빠지지 못하면서 습지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갈참나무와 졸참나무, 굴피나무, 구지뽕나무, 오동나무, 칡나무 등 다양한 식물이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한다. 꾀꼬리, 직박구리의 청아한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화려한 빛깔의 팔색조도 종종 관찰된다고 한다. 이정표에는 담비, 붉은배새매, 큰오색딱따구리 등을 묘사한 그림이 담겨 있다. 모두 운곡습지에 서식하는 동물이다.
◇ 지난 세월 보여주는 옛 마을의 흔적
생태연못에 도착하자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이 반긴다. 고마리가 뒤덮은 연못 주변으로 원추리가 주황색 꽃잎을 활짝 열었고, 어리연은 작고 노란 꽃망울을 수줍게 열기 시작했다. 애기부들은 핫도그 모양 열매를 달고 바람에 대롱거린다.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 속에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생태둠벙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옛 마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한때 9개 마을 주민 158세대, 360여 명이 닥나무를 재배해 한지를 만들었고 논과 밭을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축사로 보이는 건물의 벽이 수풀로 가득 뒤덮인 채 남겨져 지나간 시간을 증명한다.
생태둠벙을 지나자 수풀 무성한 나무 데크 탐방로가 사라지고 저수지의 물가를 따라 흙길이 이어진다. 백로, 왜가리, 논병아리, 쇠기러기를 볼 수 있다는 조류관찰대에 서자 저수지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다시 10여 분을 걷자 제1코스의 최종 목적지인 운곡습지생태공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태공원은 연못을 만들고 수로를 정비한 후 다리를 놓아 식물원을 방문한 듯하다. 조만간 습지홍보관도 문을 열 예정이다. 생태공원 인근에는 둘레 16m, 높이 5m, 무게 300t에 달하는 동양 최대 '운곡 고인돌'도 있다.
운곡습지를 탐방하기 전후로는 고인돌유적지를 돌아보도록 한다. 고창은 국내 최대의 고인돌 유적지이다. 총 1천665기가 있는데 운곡습지 탐방안내소 인근에 442기가 모여 있다.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식, 개석식 고인돌을 한 곳에서 접할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청동기시대 각종 유물과 생활상, 고인돌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도 있다. 박물관 인근 유네스코 고창생물권보전지역관리센터에서는 디오라마 AR 시스템과 첨단 영상 장비를 통해 운곡습지, 고창·부안갯벌, 선운산도립공원, 동식물 등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주변 둘러볼 곳
▲ 고창읍성 = 고창읍에 있는 둘레 1천684m, 높이 4~6m의 조선 시대 성곽. 관아를 비롯해 22개 건물이 있었지만 모두 소실됐고 현재 공북루(북문), 진서루(서문), 등양루(동문), 동헌, 객사, 내아, 향청, 옥사 등이 복원돼 있다. 여인들이 무병자수를 기원하며 손바닥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성 밟기놀이가 전해진다. 밤이면 환하게 조명을 밝혀 산책하기 좋다. 입장료는 어른 2천원, 청소년 1천200원, 어린이 800원
◇ 가볼 만한 국내 습지, 또 어디에
람사르협회에 등록된 우리나라 습지는 우포늪, 신안 장도 산지습지, 순천만·보성갯벌, 제주 물영아리오름 습지·물장오리오름 습지·한라산 1100고지 습지·동백동산습지, 울주 무제치늪, 태안 두웅습지, 전남 신안 증도 객설, 서울 한강 밤섬 등 모두 22곳이다.
▲ 창녕 우포늪 = 면적 8.54㎢의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내륙 습지. 우포(1.3㎢), 목포(53만㎡), 사지포(36만㎡), 쪽지벌(14만㎡) 등 4개 자연늪과 복원사업을 통해 늪으로 변모한 산밖벌까지 3포 2벌로 이뤄져 있다. 우포늪생태관~제1전망대~숲탐방로 1길~우포늪생태관을 잇는 탐방 코스를 비롯해 다양한 둘레길이 조성돼 있다. 산밖벌과 쪽지벌을 잇는 길이 98.8m의 우포출렁다리가 있다. 여름 우포늪에서는 가시연꽃, 여름 철새인 물꿩을 관찰할 수 있다.
▲ 순천만·보성벌교갯벌 = 전남 순천 별량면과 해룡면, 도사동 일대 순천만 갯벌과 보성군 벌교읍 해안가 갯벌을 포함한다. 2006년 국내 연안 습지로는 최초로 람사르습지로 등록됐다. 봄에는 안개, 여름에는 짱뚱어와 농게, 가을에는 갈대와 칠면초, 겨울에는 철새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용산전망대에서 감상하는 순천만의 해넘이가 아름답다.
▲ 전남 신안 증도갯벌 = 전남 신안 증도와 병풍도 일대로 모래해변, 자연형 절벽해안선, 소나무숲, 태평염전, 염생식물 군락지 등이 있다. 멸종 위기종인 노랑부리백로, 가창오리, 알락꼬리마도요가 자주 출현한다. 단일 염전으로는 국내 최대인 태평염전에서 소금 채취 체험을 하고 소금박물관을 돌아볼 수 있다. 함초, 칠면초, 나문재 등이 있는 염생식물원도 있다.
▲ 태안 두웅습지 = 충남 태안 신두리해수욕장 부근 해안사구 남쪽에 형성된 습지이다. 해안사구와 배후 산지 골짜기의 경계 부분에 담수가 고여 형성됐다. 텃새인 황조롱이와 천연기념물 323호인 붉은배새매 등 조류 39종, 멸종위기종 2급인 금개구리와 맹꽁이 등 양서류 14종, 식물, 곤충 등이 살고 있다.
▲ 제주 1100고지 습지 = 한라산 고원지대에 형성된 대표적인 산지습지로서 16개 이상의 습지가 불연속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곳 습지 동식물에 관한 안내문이 탐방로 곳곳에 설치돼 있다. 한라산에서만 서식하는 멸종위기 1급의 매와 2급인 말똥가리, 조롱이, 황조롱이 등이 서식하고 있다. 습지 낮은 곳에 고인 물은 야생동물의 식수원이 되고 있다. 나무로 만든 생태탐방로가 있어 습지를 관찰하기 좋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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