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지난 5월 타계한 미국 현대문학 거장 필립 로스(1933∼2018)의 유일한 자서전 '사실들'(문학동네)이 국내 번역 출간됐다.
"중요한 건 소설의 독자적 실체이고 작가는 그림자에 가려져야만 한다고 배우고 믿어온 내가 지금 전기적 주목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이 책 서문에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속 캐릭터 '주커먼'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해 놓았다.
이 책은 그가 55세에 발표한 작품으로, 작가로 데뷔하기 전부터 첫 책인 '굿바이, 콜럼버스'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고 그에게 더 큰 명성을 안겨준 '포트노이의 불평'을 쓰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작품 사이에는 첫 번째 아내 조제핀 젠슨과의 불행한 결혼생활이 있는데, 그는 이 결혼생활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돌아본다. 그는 이 결혼생활에서 받은 충격으로 정신분석 치료를 받은 뒤 '포트노이의 불평'을 집필한다.
그는 조제핀 젠슨을 두고 "의심할 바 없이 그녀는 나의 최악의 적이었으나, 아아, 가장 위대한 창작 선생, 극단적 소설의 미학에 있어서의 탁월한 전문가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여러 작품을 발표하고 작가적 명성을 얻기는 했으나, 그는 창작기가 절정에 이른 10년 동안 육체적 시련과 함께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고 털어놓는다. 게다가 쉰 살이 넘으면서 "책상은 무섭고 낯선 곳이 되었"고, 자신이 쓴 기존 전략들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순간이 왔다고 한다.
"그때마다 정력적으로 자기 쇄신의 결의를 굳혔지만, 이번엔 자신을 다시는 바꿀 수 없으리라 믿게 되었지. 자신을 새로 만들 수 있으리란 확신은커녕, 무너져가는 기분만 느꼈어. 나는 신경쇠약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네. (…) 그리고 신경쇠약 이후 명상의 시기에 병세 진정에 수반되는 명료한 정신으로,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수십 년간 거리를 두고 살아온 세계들에 사실상 나의 모든 깨어나는 관심을 집중하여- 내가 어디에서 시작했고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떠올리게 되었네."
그렇게 시작된 삶의 반추는 책 제목 그대로 철저하게 '사실들'(원제: The Facts)을 풀어놓는 방식으로 솔직하게 쓰였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모든 사람들과의 사적인 사건들을 고백하는 것에 신경이 쓰여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앞쪽으로 돌아가서 나와 관계되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의 실명과 그들의 신원을 드러내는 몇 가지 내용들을 고쳤네. 그렇게 하면 완벽한 익명성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믿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함부로 다루어지는 걸 조금이나마 막기 위해서였지."
이어 그는 "그런 고민들 외에도, 이 책의 출간을 어렵게 만드는 한 가지 질문이 더 있네. '이 책이 쓸모가 있긴 한 걸까?'"라고 묻는다. 책 말미에는 이 질문에 맞서는 대답으로 가상의 인물 '주커먼'이 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이 담겨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책의 쓸모에 대한 답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작가를 오랫동안 좋아한 팬들과 더불어 한 사람의 솔직하고 내밀한 삶과 생각을 유려한 문장으로 만나고 싶은 독자들이라면 흠뻑 빠져 읽을 만한 책이다.
민승남 옮김. 288쪽. 1만3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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