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 머릿속 '핵기술 제거' 쉽지 않아…발언 공개에는 이란 의도도 담긴듯
(서울=연합뉴스) 김효정 기자 = 북미 비핵화 협상이 답보하는 가운데 이란을 방문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핵지식을 보존하겠다"는 발언을 했다는 보도가 나와 관심이 쏠린다.
이란 현지 매체 보도에 따르면 리 외무상은 9일(현지시간) 알리 라리자니 이란 의회 의장을 만나 "우리는 미국과 협상에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핵화에 동의했지만 미국이 우리에 대한 적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핵지식을 보존하겠다"고 말했다.
북한과 미국이 각각 '핵시설 신고를 필두로 한 비핵화 조처'와 '조기 종전선언을 통한 신뢰구축'을 요구하며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 핵지식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돌연 거론된 것이다.
물론 리 외무상이 해당 발언을 한 구체적인 맥락은 알려지지 않았고, 이를 대외에 공개한 것도 북한이 아닌 이란 매체다.
그러나 북한과 이란이 대미 핵협상 전략을 초미의 관심사로 공유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긴밀한 의견교환 과정에서 리 외무상이 이란 측에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했다고는 볼 수 있다.
특히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비핵화를 한 이후에도 핵 기술과 지식을 그대로 갖고 있다면 CVID 가운데 '불가역적'(Irreversible) 폐기는 사실상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핵지식의 핵심은 결국 사람, 기술자에 관련된 문제다. 되돌릴 수 없도록 하려면 사람들까지 소거해야 하는 것"이라며 "이는 패전국에나 강요하는 것이라는 의도가 포함된 것"이라고 말했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도 "CVID의 'I'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 명확히 거부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다만 학자와 기술자들의 머릿속에 든 핵 관련 기술과 지식까지 어떻게 '불가역적으로' 없앨 수 있느냐는 핵협상 전례를 봐도 쉽지 않은 과제다.
북한의 핵 과학자나 기술자들의 재훈련, 재취업 문제가 협상에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이 그간 제기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핵 개발에 동원된 옛 소련 과학자 등의 인력에 전직(轉職) 훈련과 직장 알선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했던 '넌-루가 법'이 참고 모델로 거론되기도 했다.
아울러 북한의 '핵지식 보존' 입장이 이란 매체를 통해 노출된 것에는 핵합의(JCPOA) 파기로 트럼프 행정부와 심한 갈등을 빚고 있는 이란의 속내가 반영됐을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합의에서 강한 불만을 보였던 대목이 핵능력 제한을 10∼15년으로 한정한 '일몰규정', 즉 가역성이었기 때문이다.
조성렬 수석연구위원은 "(발언 공개에는) 이란의 의도가 들어간 것이지 북한의 의도가 담겼다고는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편 리 외무상의 '핵지식 보존' 발언에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권리' 행사를 주장하려는 의도가 담겼을 수 있다는 분석도 일각에서 나온다.
북한은 지난 5일 미·일 원자력협정 자동연장을 비난하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백서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지향해 나가려는 것은 우리 공화국의 확고부동한 입장"이라고 밝힌 바 있다.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핵 관련 기술은 경제 발전에 필요하니 계속 활용할 생각이라고 (리 외무상이) 얘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관측했다.
kimhyoj@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