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일부 ATM 달러·유로 바닥…에르도안 "위기 아니다" 큰소리
터키 경제계 "금융권 건전…대량인출사태는 안 날 것"
(이스탄불=연합뉴스) 하채림 특파원 = 화폐가치 폭락으로 비상등이 켜진 터키에서 일반 주민 사이에도 위기감이 급격히 고조됐다.
11일(현지시간) 이스탄불 '전통시장' 그랜드바자르 내 일부 환전소에는 가진 터키리라를 달러로 바꾸려는 주민들로 북적였다.
전날 터키리라는 미달러 대비 14% 폭락하며 '검은 금요일'을 보냈다.
올 들어 이날까지 리라 가치는 41%가량 추락했다.
앞으로 더 리라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환율이 좋은' 환전소에는 가지고 있는 리라를 달러로 바꾸려는 이스탄불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폐장 시간대에는 은행의 환율이 대체로 고객에 불리한 데다 그랜드바자르 내의 이 사설 환전소는 미리 보유한 외환 재고를 활용해 기준 환율보다 더 싼 값으로 달러를 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환전 수요가 몰렸다.
소셜미디어에는 어느 환전소가 가장 유리한지 정보를 공유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현금, 특히 달러나 유로를 인출하려는 움직임에 이용객이 많은 일부 현금자동인출기(ATM)에서는 외화가 바닥났다.
이스탄불에 사는 40대 한인 이모씨는 "계좌에 남아 있는 유로를 다 찾으려고 집 근처 ATM을 돌았는데 전부 잔액이 없었다"면서 "내일 현금이 보충될 수 있으니 다시 가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최근 리라화 폭락장세 속에 외화 잔고를 해외 계좌로 이체하는 움직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기업 터키법인에 근무하는 신모씨는 "터키 은행 계좌에 있는 달러를 한국에 있는 계좌로 이체했다"면서 "터키인 친구들도 상황이 심각해지면 출금 제한이나 이체 제한 조처가 나올 수 있다고 걱정한다"고 전했다.
온라인 계좌만을 이용하는 한 교민은 일일 출금 상한액 탓에 잔액을 전부 인출하느라 며칠이 걸렸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털어놨다.
터키정부가 현금 대량 인출사태, 즉 뱅크런을 막기 위해 인접 그리스의 경험처럼 출금 제한 조처가 있을지 모른다는 염려다.
앞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베개 밑에 있는 달러, 유로, 금을 팔고 리라화를 사라"거나 "그들에게 달러가 있다면 우리에겐 알라가 있다"며 신앙심과 애국심에 호소했으나 거리에서는 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터키 경제계는 뱅크런 같은 극단적인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터키 대기업 알라르코의 최고재무관리자(CFO) 외메르 첼리크는 "터키 은행은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고 있고 신뢰를 잃지 않았다"면서 "2008년 위기 당시 금고가 거의 바낙난 그리스 은행권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현 터키 상황은 위기가 아니라 '경제전쟁'의 목표물이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흑해 연안 리제주(州)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터키는 무너지지도, 파괴되지도, 파산하지도 않을 것이며, 위기에 빠진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그는 "현실에서 우리와 경쟁하지 못하는 자들이 생산과 실물 경제 등 나라의 현실과 다르게 온라인에서 허구적인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역설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가장 중요한 것은 (달러, 유로, 금으로) 터키를 공격하는 손을 깨부수는 것"이라며,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터키리라화 불안의 근본 원인은 고질적인 경상수지적자와 대규모 외채이지만, 최근의 화폐가치 급락은 미국과 관계가 악화된 탓이 크다.
터키는 ▲ 미국인 목사 장기 구금 ▲이란 제재 불참 ▲러시아 방공미사일 도입 ▲무역 전쟁 ▲시리아 사태 등 여러 이슈로 미국과 반목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달 1일 앤드루 브런슨 목사 구금을 이유로 터키 장관 2명에게 제재를 부과한 데 이어, 3일에는 터키산 철강·알루미늄에 '관세폭탄'을 투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터키산 철강·알루미늄 관세를 2배로 상향 조정한다고 알리면서 "터키와 관계가 별로 안 좋다"고 말해, 이번 조처가 제재·압박 성격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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