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상이 관리·감독한 만큼 '처분행위'라 볼 수 없어"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 금괴를 밀수하는 과정에서 운반책 역할을 맡은 이들이 밀수업자의 눈을 피해 10억원 넘는 금괴를 빼돌려 이득을 취했지만, 이를 '사기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고 대법원이 판단했다.
대법원 1부(이기택 대법관)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기소된 정모(31)씨의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정씨는 금 중개무역상인 A씨가 지난해 3월 금괴를 밀수하기 위해 운반책을 모집하는 과정에 관여하면서, 운반책들이 이를 다시 빼돌리려 공모한 것을 알고도 방조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A씨는 홍콩에서 대량 구입한 금괴를 일본 후쿠오카에서 처분해 시세 차익을 얻기로 했다. 아울러 1인당 4㎏을 넘는 금괴에 부과되는 높은 관세를 피하고자 여러 명의 운반책을 모집했다.
A씨의 모집에 응한 운반책들은 금괴를 빼돌리기로 공모했다.
이들은 인천국제공항 면세구역에서 허리띠에 든 금괴를 전달받은 뒤 A씨를 속이고 몰래 준비시킨 2차 운반책들에게 이 금괴를 건네줘 일본 오사카로 빼돌렸다. 이렇게 빼돌린 금괴가 13억여원어치에 달했다.
1·2심 재판부는 이들의 행위가 A씨를 속여 금괴를 챙긴 것이므로 사기죄가 성립한다고 보고 징역형을 선고했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과연 A씨 측에서 운반책들에게 금괴를 넘긴 것이 사기죄의 구성요건인 '처분행위'라고 볼 수 있느냐에서 판단이 갈렸다.
처분행위란 범인이 속이는 바람에 착오에 빠진 피해자가 재물의 지배권을 사실상 범인에게 넘기는 행동을 말한다. 이는 탈취라는 방법으로 재물을 빼돌리는 절도죄와 사기죄를 구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A씨가 재물의 지배권을 정씨 등에게 넘겼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A씨는 금괴를 건네받은 일부 운반책들이 비행기 탑승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동행하며 감시를 했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금괴를 넘기기로 한 사람에게 미리 운반책들의 사진을 건네주고 대기하도록 하는 등 운반책들의 이탈을 방지하는 준비도 했다.
결국 A씨가 운반책의 이동을 관리·감독한 만큼 운반책들에게 속아 지배권을 넘겨줬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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