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에 '선술집' 차린 이강소 "멍석만 깔죠, 나머진 관객 몫"

입력 2018-08-23 15:26  

갤러리에 '선술집' 차린 이강소 "멍석만 깔죠, 나머진 관객 몫"
내달 갤러리현대서 1970년대 실험미술 집중 조명한 '소멸' 전 개막
첫 개인전 '소멸' 재현 …전시장에 닭 풀어놓는 퍼포먼스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테이블마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이까지 들리는 듯하다. '낙지복음' '생태찌개' 등을 어설픈 궁서체로 써놓은 표지판도 보인다. 사람들 행색 등으로 보아 퇴근길 직장인들이 찾은 어느 술집으로 짐작된다.
1973년 서울 중구 YWCA빌딩 지하 명동화랑에 미술가 이강소가 '차린' 선술집 풍경이다. 작가는 낡은 테이블과 의자들을 갖다놓고 무교동 길거리에서 주워온 메뉴판까지 설치한 뒤 '소멸'이라 이름 붙였다. 이강소 첫 개인전을 보려는, 아니 술을 마시려는 문화예술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예술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100원만 내면 탁주 한 잔을 즐길 수 있었다.
'소멸'은 도자기며 꽃이며 여인 그림을 걸어놓던 당시의 여느 전시와 사뭇 달랐다. "유명한 연극인이 와서 '우리 연극은 이제 끝났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진짜 연극이란 거죠."
23일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만난 이강소(75) 작가는 당시를 촬영한 흑백사진 앞에 선 채 껄껄 웃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30살 젊은이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살짝 배가 나온 노인이 됐다.



오리를 떠올리게 하는 회화 작업 때문에 '오리 작가'로 유명하지만, 이강소는 일찌감치 국내 실험미술 최전선에 섰다. 특히 1970년대에는 아방가르드협회(AG), 대구현대미술제 등을 주도하며 퍼포먼스나 이벤트 형식을 빌린 다채로운 실험을 벌였다.
다음 달 4일 갤러리현대에서 개막하는 이강소 개인전 '소멸'은 당시 작업을 소개하는 자리다.
1층에는 '소멸'이 재현됐다. 이 작업에는 당시 전시를 앞두고 선배와 막걸리 주점을 찾은 경험이 녹아들었다.
"기분이 얼큰해지면서 보니까, 분명 선배는 내 앞에 존재하는데 지금 나 자신은 나를 볼 수도,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증명할 수도 없더라고요. 그 생각 끝에 모두 각자가 느끼는 대로 각자의 세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화이트 큐브에 주점을 전시한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관객 여러분도 일상의 행위를 전시장에서 자기 식대로 곱씹어 보라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곱씹는 관객 또한 작품 일부가 된다.



작가는 이렇게 시간과 존재에 대한 체험, 생성·소멸을 반복하는 자연 질서를 주제로 한 작업을 이어갔다.
2층에 재현된 '무제-75031'은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 화제를 낳은 닭 퍼포먼스다. 횟가루가 뿌려진 전시장에서 닭을 키우고, 그 흔적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이날도 뽀얀 청계(푸른 빛의 알을 낳는 닭) 한 마리가 등장해 취재진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닭은 이곳에 사흘간 머무른 뒤 농장으로 돌아간다. 관람객은 횟가루 위 남겨진 발자국과 사진을 통해 그 흔적의 정체를 저마다 유추하게 된다.
맞은편 벽에는 검은 합판 위에 굴비 몇 마리가 걸렸다. 작가는 "우리는 죽으면 관에 들어가지 않느냐. (관을 떠올리게 하는) 여기 판에 굴비를 걸어둘 테니, 우리 각자 생각해 보자는 것"이라면서 또 껄껄 웃었다.
"저는 멍석을 까는 작가예요. 멍석만 깔아주고 나면 그 이후는 관람객 몫이지요. 허허허.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에요, 암시하는 것이지요."
갤러리현대 4층에서는 소규모이지만 회화 근작들도 감상할 수 있다. 오리, 사슴 등이 떠오르는 캔버스 위 리드미컬한 붓질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자신을 단색화가로 분류하려는 일각의 움직임에는 다시 한 번 "단색화에 큰 의미를 안 뒀으면 한다. 저보고 단색화가라고 하는 건 언어도단"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10월 14일까지. 문의 ☎ 02-2287-3500.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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