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재의 불가해함 묻는…박지리 소설 '번외'

입력 2018-09-20 06:03  

인간 존재의 불가해함 묻는…박지리 소설 '번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유일한 생존자의 고뇌 그려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내달 초 초연하는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원작자인 고(故) 박지리 작가의 소설 '번외'(출판사 사계절)가 출간됐다.
작가는 만 25세였던 2010년 '합체'로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맨홀', '양춘단 대학 탐방기',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등 독특한 작품들을 남기고 2016년 3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출판사는 이번에 낸 '번외'가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전했다.
이 소설은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모순이 가득하고 불가해한 인간 존재와 삶의 복잡한 단면을 보여준다.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주인공 소년이 소설 화자로 등장한다. 참사 1주기 추도식 다음 날 학교를 벗어나 배회하며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들려준다.
끔찍한 총기 난사 사건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세상은 그를 '번외' 취급한다. 학교에서는 숙제를 안 해가거나 지각해도 눈감아 주고, 학교를 조퇴하겠다는 요구도 선선히 들어준다. 사람들은 그가 입은 교복을 알아보고 참사와 추도식에 관해 말한다. 소년은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을 느끼는 한편, 사람들이 평범했던 희생자들을 '고귀한', '천사' 같은 존재로 격상시키는 것 역시도 이해하지 못한다.
가해자 K에 대해서는 영화감상반을 함께하며 진지한 얘기를 나눈 기억 때문에 공범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소년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심리 속에 끊임없이 삶과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다. 인간이 왜 삶을 지속해야 하는지, 왜 어떤 사람의 죽음은 애도하고 어떤 사람의 죽음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지 묻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꼬집는다.
소년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사람들에게 시비를 거는 한 늙은 남자를 보며 "지금 저 남자를 차로 치어 죽이면 이 거리와 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단 1퍼센트라도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한다.
"1퍼센트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고작 1퍼센트라니. 100퍼센트여야 한다고, 최소한 한 사람을 죽일 때는. 그를 죽여서 온 인류가 100퍼센트 행복해질 때, 그를 죽이는 일에 단 한 명이라도 양심의 가책이나 우울, 슬픔, 다음 날 변덕을 느끼지 않을 때, 그 사람을 낳은 여자와 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전혀 모르는 먼 극지방의 사람들까지도 그를 죽이는 데 찬성표를 던질 때만 비로소 한 사람을 죽이는 게 허용되는 거야." (125쪽)
이는 다시 반박된다.
"잠깐. 그건 1퍼센트의 가능성도 없는 얘기잖아. 구름이 잠깐만 해를 가려도, 그림자가 조금만 길쭉해져도, 비행기가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도 금방 울적해지는 인류에게 100퍼센트 동의란 게 가능하겠어? 저 늙은 남자의 엄마까지 마침내 저 애를 죽이세요, 라고 동의해서 저 남자를 없애 버린다 해도 분명 다음 날, 닥터 장의 상담소엔 선생님, 아무래도 우리 인류가 어젯밤 크나큰 죄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인류는 또 퇴보하고 말았어요, 라고 고백하는 환자가 찾아올거야."
이렇게 모순덩어리인 인간들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잘난 체를 하거나 삶의 욕망만을 앞세울 때, 소년은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면서 자신 역시 삶을 욕망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냉소한다. "하여튼 되게 살고 싶어 한다니까." (147쪽)
출판사 측은 "총기 난사 사건과 세월호 참사는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묘하게 우리가 처한 비극적 현실이 겹쳐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생존자들이 겪는 심적 고통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세월호 참사 전에 쓴 것임을 밝혀 둔다. 작가의 통찰력이 놀라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mi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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