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키운 배추 갈아엎는 농민도…빈손으로 맞는 한가위
(원주·태백=연합뉴스) 배연호 양지웅 기자 = "수확할 사과도, 나무도 하나 남지 않았어요. 풍성한 추석은 남 이야기일 뿐이지요."
농사꾼에게 가장 흐뭇하고 또 풍성해야 할 추석이 찾아왔다. 농부들은 논과 밭, 과수원에서 저마다 땀 흘려 키워낸 작물을 거두며 수확의 기쁨을 풍성히 누린다.
하지만 강원 원주시 신림면에서 10년째 사과를 키우던 이영희(63)씨는 그 기쁨을 송두리째 뺏겨버렸다.
'과수 구제역'으로 불리는 화상병이 농장을 덮쳐 1천600여 그루의 사과나무를 뿌리째 모두 뽑아 땅에 묻어버린 까닭이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22일 오전, 허허벌판으로 변해버린 농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씨는 답답함을 넘어 슬픔을 토로했다.
"어제 충북 제천을 오가는 길에 사과나무가 보이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
이씨는 부인과 함께 10년째 1만3천여㎡ 규모로 사과농장을 일궈왔다.
지난해에는 부사, 홍옥, 양광 등을 18㎏들이 4천여 상자를 출하했다.
올해도 가지치기, 솎아내기 등 품이 많이 드는 작업들을 다 마치고 수확만 기다리던 터였다.
이씨는 올해가 가장 상품성 좋은 사과가 나올 때라고 설명했다.
"사과농사라는 게 나무 심고 1∼2년 지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7년은 지나야 먹을 만한 사과가 열리는데, 10년이면 최상급 사과가 나올 때죠."
그는 지난 5월 초 나뭇잎들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했다. 새로 나는 잎이 끝에서부터 마르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화상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올봄 갑자기 추위가 닥쳤기에 냉해라고 여겼다.
증상이 다른 나무들로 점차 번지자 그는 농업기술센터로 신고했고, 6월 말 화상병 통보를 받았다.
화상병은 사과·배에 주로 피해를 주는 세균성 식물병이다. 병에 걸린 나무는 흑갈색 병반이 나타나면서 잎이 시들고, 줄기가 서서히 마르기 시작해 결국은 검게 변하면서 죽는다.
뚜렷한 치료법이 없어 발생 농장 주변 100m 안에 있는 과수는 뿌리째 캐내 땅에 묻은 뒤 생석회 등으로 덮어 살균해야 한다.
결국, 이씨는 당구공만 한 사과를 주렁주렁 달고 있던 나무들을 모두 묻어버렸다.
2개월이 지난 지금, 텅 빈 농장을 보는 이씨는 생각이 복잡하다.
다시 사과농사를 시작하면 적어도 7년은 지나야 수익을 내기 시작하는데, 때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자신 때문이다.
빚으로 사들인 농기계는 화상병 농가에서 쓰던 것이기에 아무도 중고로 사들이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보상 소식은 전혀 없어 앞으로가 막막하기만 하다.
"군청이나 농업기술센터에 보상 얘기를 꺼내면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와요. 답답해 미칠 지경이지."
화상병이 아니었다면 할아버지 집을 찾아온 큰 손자는 물론 며느리 뱃속의 작은 손자까지 두둑한 추석 용돈을 챙겨줬을 터지만, 지금은 아들들에게 용돈을 받아야 할 처지가 돼버렸다.
같은 날 전국에서 가장 높은 강원 태백시 매봉산 고랭지 배추밭은 악취가 진동했다.
배추 썩는 냄새다.
수확철이 한참 지났지만, 곳곳에 배추가 그대로 남아있다.
폭염으로 물러져 추석을 앞두고 모두 출하돼야 했지만, 상품가치를 잃고 버려진 배추들이다.
매봉산에서는 매년 5t 트럭으로 1천600대 규모의 배추가 생산된다.
그러나 올해는 간신히 300대만 건졌다.
나머지 1천300대는 사실상 밭에서 폐기됐다.
이정만 태백 매봉산 영농회장은 "고랭지 배추 농사꾼이라고 하면 한해 5천만∼6천만원은 손에 쥐어야 하는데 올해는 빈손이다"라며 한숨 쉬었다.
그는 "풍년이라면 추석을 앞두고 배추밭 정리가 벌써 다 끝났을 시기이다"며 "아직도 밭에 그대로 남아 썩는 배추는 최악 흉작으로 썩는 농심을 말한다"고 말했다.
현재 매봉산에서는 트랙터로 배추밭 갈아엎기 작업이 한창이다.
애써 키운 배추를 갈아엎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내년 농사를 위해서는 서리가 오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이다.
"올해는 빈손"이라며 근심하던 이씨는 "풍성해야 할 추석인데 너무 속상해 한숨만 나온다"고 토로했다.
태백시 관계자는 "흉작에다 추석을 앞두고도 배추가격이 하락세를 보여 농민들의 걱정이 더 깊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병해와 폭염으로 여름 내내 시름겨워하던 강원 농민들은 빈손으로 추석을 맞게 됐다.
yangdoo@yna.co.kr
(계속)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