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만오 교수 논문…조선시대에 60회 치러 353명 급제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시대 비정기 문과 시험 중 외방별시(外方別試)는 지방에 거주하는 유생을 위무하기 위해 치러졌다는 주장이 나왔다.
외방별시는 최종 급제자를 선발한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에 각 도에서 시행한 제1차 시험인 향시(鄕試)보다 격이 높았다.
조선시대 과거 제도를 연구하는 송만오 전북대 연구교수는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가 내는 학술지 '한국민족문화'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에서 "외방별시는 일반적 과거시험과는 달랐다"며 "왕이 어느 지역을 방문하거나 어떤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 그 지방에 거주하는 유생들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개설했다"고 분석했다.
송 교수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이 존속한 태조 2년(1393)부터 고종 31년(1894)까지 약 500년간 시행된 외방별시는 60회라고 설명했다.
외방별시는 세조 6년(1460) 임금이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순행했을 때 처음 열렸다. 세조 때 4회 치러진 이후 중종(재위 1506∼1544) 때 2회 펼쳐졌고,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재위 1567∼1608) 때부터는 거의 빠짐없이 외방별시가 개최됐다.
산술적으로는 7.2년마다 한 차례씩 외방별시가 진행됐다.
송 교수는 외방별시를 개설한 배경으로 왕의 온천과 왕릉 행차, 전란이나 변란으로 인한 임금 피신, 어진(임금 초상화) 봉안과 이전을 꼽았다.
그는 "조선시대 유생들에게 문과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처럼 여겨졌고, 문과에 도전하는 행위는 특권으로 인식됐다"며 "외방별시가 열린 지역에 사는 사람은 자신들만을 위해 과거가 마련됐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외방별시는 특정 지역민을 위한 시험인 만큼 해당 지방에서 9년 이상 거주하고, 이곳의 향교나 서원에서 작성한 유적(儒籍)이나 교안(校案)에 이름이 올랐어야 응시가 가능했다.
예컨대 온양별시는 충청도 유생, 전주별시는 전라도 유생에게 시험을 볼 기회가 주어졌다. 다만 제주별시는 전라도를 제외한 제주도 유생, 강화별시는 오직 강화 유생에게만 응시 자격이 부여됐다.
아울러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과거장에서 시험을 치를 수 없도록 한 부자상피(父子相避)가 적용되지 않은 점도 특징이었다. 실제로 숙종 43년(1717) 온양에서 열린 외방별시에서는 아버지 이성채와 아들 이유춘이 동시에 급제했다.
송 교수는 "급제자 지역 할당도 외방별시의 특이점"이라며 "도(道) 전체에 응시 기회가 있으면 북도와 남도 출신을 고르게 선발했으나, 더러는 특정 군현 사람을 더 배려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외방별시 급제 비율은 높았을까.
외방별시로 배출한 급제자는 모두 353명으로, 조선시대 전체 문과 급제자 1만4천609명의 2.4%였다. 이는 외방별시가 전체 문과에서 차지한 비율 7.9%보다 훨씬 작은 수치다.
송 교수는 "세조와 고종 때 시험을 제외하면 회당 급제자가 10명을 넘지 못했고, 평균은 6명에도 미치지 않았다"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외방별시를 많이 시행했지만, 급제자 중 외방별시 출신 비율은 오히려 감소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외방별시는 특히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많이 열렸고, 이 지역에서 합격자가 많이 나왔다"며 "외방별시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시험별 개별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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