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래틀 &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리뷰
(서울=연합뉴스) 최은규 객원기자 = 마치 일급 풍경 화가에게 최고급 물감 세트가 주어진 듯했다. 지휘자 손짓에 따라 시시각각 변모하는 오케스트라는 색채가 경이로웠다. 래틀과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의 시벨리우스 교향곡을 듣기 전까지 우리는 시벨리우스 음악에 담긴 북유럽 대자연의 신비가 바로 이런 것이었음을 지금껏 알지 못했다.
지난 1일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선 사이먼 래틀과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는 환상의 호흡을 과시하며 드보르자크와 시벨리우스 음악의 다채로운 색감을 살려낸 연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악보의 세부를 파고들며 다양한 색채와 리듬 묘미를 살려내는 래틀의 음악적인 개성은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를 만나자 비로소 완전하게 구현된 듯했다.
그것은 상투적이고 일반적인 드보르자크와 시벨리우스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 튀어나온 악센트, 악보에 적힌 피아니시시모(ppp)를 능가하는 극도의 여린 음, 활털이 아닌 활대로 치듯 연주하는 현악기 주자들의 파격적인 연주법 등 악보에서 벗어난 각종 일탈이 자행됐지만, 그들의 연주를 듣는 동안 그 모든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졌다. 그 모든 시도가 드보르자크와 시벨리우스 음악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춤곡 작품72의 4곡과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5번을 조합한 공연 프로그램도 무척 독특했다. 공연 초반에 드보르자크 슬라브 춤곡 3곡을 연주한 후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이 이어지고, 공연 후반부에 슬라브 춤곡 한 곡 연주에 이어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이 연주된다는 프로그램 구성은 일반적인 관현악 콘서트 프로그램 틀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다소 낯선 프로그램 구성 때문인지 관객들은 드보르자크 슬라브 춤곡 한 곡 연주가 끝나자 큰소리로 박수를 치다가 멋쩍은 표정으로 박수를 멈추기도 했다. 짧은 춤곡 하나하나를 개별 작품으로 보아야 할지 큰 작품을 이루는 하나의 악장으로 보아야 할지 다소 애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 마지막 곡으로 시벨리우스 교향곡이 연주되자, 비로소 여러 춤곡과 교향곡을 조합한 독특한 프로그램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드보르자크 슬라브 춤곡에 담긴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정서는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의 독특한 형식과 다채로운 표정 변화와 무척이나 닮았기에, 드보르자크 슬라브 춤곡들은 다채로운 악상을 담은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과 매우 잘 어울렸다.
드보르자크 슬라브 춤곡은 마치 시벨리우스 교향곡에 대한 일종의 전주곡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시벨리우스 교향곡의 독특한 형식이나 변화무쌍한 악상 전개가 부자연스럽거나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이미 드보르자크 슬라브 춤곡을 통해 귀가 길들었기 때문인 듯했다.
음악회 전반부에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 재닌 얀센의 열정적인 연주 또한 청중에게 깊은 감흥을 전했다. 1악장 도입부 바이올린 연주는 "매우 춥고 맑은 북구의 하늘과 같다"는 시벨리우스 자신의 표현을 그대로 구현한 듯 참신하고 신비로웠다.
특히 바이올린 G현의 굵은 음색을 잘 활용하며 마치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듯 표현한 2악장이 감동적이었다. 음악작품을 분석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얀센의 연주 스타일은 한국 청중의 정서에 잘 맞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떤 음악이 펼쳐질지 예측 가능한 안정적인 연주 방식은 때때로 진부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오히려 그녀가 앙코르로 선보인 바흐의 파르티타 제2번 '사라반드' 악장에서 마치 바로크 바이올린을 연주하듯 가벼운 음색으로 미묘한 장식음을 추가한 연주가 한결 참신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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