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권순관 "역사 속 '침묵의 공간' 비추는 것이 제 일"

입력 2018-10-19 10:22  

사진가 권순관 "역사 속 '침묵의 공간' 비추는 것이 제 일"
국가폭력 희생자 흔적 담은 사진전, 삼청동 학고재서 개막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사방이 컴컴하다. 무엇이 눈앞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큐레이터 안내대로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고 화면을 비추자, 무성한 수풀과 꿈틀거리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18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지하에서 '어둠의 계곡'을 감상하는 경험은 독특했다. 가로 7m 20cm에 달하는 시커먼 그림을 손전등으로 여기저기 비추는 동안, 전시장이 아닌 숲속을 헤매고 다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햇볕 한 줌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빼곡한 숲은 천장 조명이 약하게 빛을 발산할 때에만, 살짝 윤곽을 드러냈다.
68년 전 어느 여름날, 충북 영동의 한 땅굴에 숨어들었던 피난민 수백 명도 같은 어둠을 보았을까. 사진가 권순관이 미군 양민 학살 현장인 노근리 야산을 찾아간 것은 2016년이었다. 그는 암매장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숲속에 텐트를 치고 일주일 가까이 지냈다.
"그곳에 선 채 제가 작가로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어요. 어느 순간 희생자들 시신이 썩은 뒤 잎으로, 돌로, 나무로 돼 이곳에 남아있는 모습을 상상하게 됐어요."
작가가 숲 자체만을 촬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한 이유다. '어둠의 계곡'은 평범해 보이는 숲을 통해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가 숨겨져 있음을 전한다.



19일 학고재갤러리 신관에서 개막하는 권순관 개인전 '더 멀치 앤드 본스'(The Mulch and Bones)는 역사 속 '침묵의 공간'을 들춰내 선보이는 자리다. '멀치'는 덮개를 뜻한다.
'침묵의 공간'은 불현듯 떠오르는, 잊고 있던 혹은 숨겨진 옛 기억을 말한다. 작가는 개인만이 아니라 역사에도 이러한 '침묵의 공간'이 있다고 믿는다. 그는 지난 10년간 사진을 통해 그러한 '침묵의 공간'을 들춰내는 작업에 매진해왔다.
7m에 이르는 '파도'는 표선 해변을 쉼 없이 때리는 거친 파도를 보여준다. 시나의 8×10인치 대형 카메라와 조명을 바위에 설치하고 암천을 뒤집어쓴 채 높이 2, 3m 파도를 수백 차례 맞아가며 잡아낸 장면이다.
작가는 제주 4·3 희생자들 시신이 대거 버려진 표선 해변에서 폴 발레리 시 '해변의 묘지'를 떠올렸고, 이는 '파도' 작업으로 이어졌다.
파르라니 일어난 포말이 인상적이다. 카메라 필름에 소금물이 들어가 부식되면서 일어난 색 변화가 인위적으로는 흉내 내지 못할 그림을 만들어냈다.



1973년 전주에서 태어난 작가는 사정상 부모와 떨어진 채 성장했다. 외로움에 시달렸던 작가는 아버지가 장롱에 두고 간 캐논 카메라를 만지작대면서 사진에 빠져들었다.
개인과 환경 관계를 파고들던 작가는 2007년 5.18 기념재단 올해의 사진가로 선정되면서 작업의 큰 줄기를 바꾸게 됐다.
권순관의 작업은 국가폭력을 직접 고발하지 않는다. 풍경 사진 혹은 요즘 유행하는 단색조 계열 회화처럼 보이는 작업 뒤로 은근히 비극을 전한다. "묘사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 흔적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니깐요."
전시는 11월 10일까지. 문의 ☎ 02-720-1524.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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