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남 교수, 1938년 국가총동원법 결재문 등 분석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추진한 전시 강제동원 공문서의 최종 결재자는 히로히토(裕仁, 재위 1926∼1989) 일왕이며, 그에 따른 법적 책임도 명확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 근대사 연구자인 김경남 경북대 교수는 지난 20일 한일민족문제학회와 경북대 사학과가 경북대에서 개최한 학술회의에서 일제 강제동원의 세계성과 역사적 책임에 대해 발표했다.
김 교수는 일제가 무력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과 대만, 만주, 가라후토(樺太·사할린)에서 물자와 인적자원을 동원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이를 통해 식민지 체제를 통합해 다스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 국립공문서관 서명원본 문서군에 있는 법률 제55호 '국가총동원법' 원본에 주목했다.
김 교수는 "국가총동원법을 견인하고 찬동한 협력자는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廣田弘毅)를 비롯한 각 성(省) 대신이며, 상신한 사람은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마<磨에서 石 대신 呂>) 내각총리대신"이라며 "일왕은 1938년 3월 31일 최종 결재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국가총동원법을 조선, 대만, 가라후토에 시행하도록 한 것은 칙령 제316호로, 고노에와 척무대신 오타니 손유(大谷尊由) 주도 아래 일왕이 1938년 5월 3일 결재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국가총동원법과 관련 칙령 이외에도 1938∼1942년에 만든 직업소개소 관제(官制), 임금통제령, 국민징용령, 총동원업무 사업주계획령, 임금임시조치령, 조선총독과 대만총독 감독 등에 관한 건을 최종 결재한 인물도 일왕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국가총동원법과 칙령은 일본 세력권 안에 있는 모든 민중이 자신들의 희망이나 자유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쟁에 동원되도록 했다"며 "그 과정에서 식민지는 군수 병참기지로 변화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히로히토 일왕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46년 자신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선언했고, 전후 처리가 국제정치적으로 이뤄지면서 전쟁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김 교수는 "전시에 일본 당국이 공무를 집행해 강제동원을 추진했고, 이에 관한 문서를 마지막에 결재한 인물이 일왕이라는 사실은 기록학적으로 더 명확해졌다"며 "강제동원 기록이 모두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문서 아카이브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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