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병원에 예술이 피었다…광주가 상처를 보듬는 법

입력 2018-10-22 08:00   수정 2018-10-22 14:17

버려진 병원에 예술이 피었다…광주가 상처를 보듬는 법
11년만에 열린 옛 국군광주병원, 광주비엔날레 전시장 중 가장 화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마이크 넬슨 등 역사·장소 고찰한 작업 전시



(광주=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따그닥. 어스름이 내려앉은 시간, 폐병원을 말없이 돌아보던 사람들 신경이 곤두섰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주먹만 한 당구공이 혼자서 조금씩 몸을 굴리고 있었다. 상아색 때문인지 달걀귀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처 몰랐던 '원주민'과 마주친 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국군광주병원이 문 닫은 11년 전에도, 비극이 벌어진 38년 전에도 존재했을 것 같은 이 공은 태국 영화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설치작품 '별자리' 일부다.
그를 비롯해 세계에서 손꼽히는 작가들이 지난봄과 여름 이곳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2018 광주비엔날레' 프로그램인 'GB커미션' 작업을 위해서다. 중반을 넘긴 비엔날레 무대 중 가장 화제를 모으는 옛 국군광주병원을 19일 찾았다. 이날도 사람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2층 건물 여러 채가 이어진 병원은 외관부터 음산했다. 벽면 백색 페인트는 너덜거렸고, 창들은 성한 데가 없었다. 넝쿨들이 건물을 마음대로 휘감았다. 건물 내부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곳이 현대미술 부름을 받은 것은 1980년 5월 광주 무대이기 때문이다(5·18 사적지 23호). 계엄사 심문 도중 고문이나 폭행으로 다친 사람들은 민간병원이 아닌 이곳으로 실려 왔다.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환자를 취조하기도 했다. 곡절 많은 세월을 보낸 이곳은 병원이 2007년 전남 함평으로 이전하면서 빈 상태가 됐다.
이러한 역사성 때문에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재단 대표이사는 오래전부터 이곳을 눈여겨봤다. '광주 정신'을 시각화하는 신작 프로젝트 'GB 커미션' 무대가 된 배경이다.
병동 방마다 하나 혹은 둘씩 선 기둥은 알제리계 프랑스 작가인 카데르 아티아가 한옥 철거현장에서 수집한 대들보, 서까래들이다. 기둥은 병원에 머머무른 사람들처럼 보인다. 작가는 여기에 금속 스테이플러를 박음으로써, 치료를 통해 또 다른 상처가 생길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별자리'는 병원을 구성하는 여러 채 병동 중 맨 뒤 건물에 있다. 블루투스 장치를 통해 스스로 움직이는 당구공들, 희미하게 깜빡이는 전구들, 깨진 창을 통해 보이는 흑백 영상. 이들은 '별자리'를 구성하는 별이었다. 과거를 넌지시 알려주면서도, 영령들을 무리하게 깨우지 않겠다는 작가 의지로 읽힌다.
'별자리'는 작가 특유의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덤불로 뒤덮인 병원 또한 숲과 정글이 자주 등장하는 기존 작업과 연결되는 면이 있다. 김 대표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고 설명했다.
병원 맞은편 버려진 국광교회 또한 'GB커미션' 무대다.
영국 설치작가 넬슨이 병원에서 떼온 거울 60여개가 교회 천장에 매달린 채 관람객을 맞이한다. 작가는 5월 광주를 포함해 지난 세월을 묵묵히 지켜봤을 이들 거울을 제거하고 새롭게 설치하는 작업을 통해 '거울의 울림'을 완성했다.
관람객은 '손 씻기 안내' '두발 규정' 등 각종 글과 심지어 사진까지 남아있는 수십 개 거울을 바라보면서 이 거울이 비췄을 사람과 그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거울은 그 모습을 다시 비추고, 거울이 품은 이야기는 한겹 더 쌓인다. 그렇게 1980년과 2018년은 공명한다.



어두운 역사 현장을 찾는 '다크투어'가 인기인 시대, 옛 국군광주병원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목적지다. 하지만 오도카니 선 나무기둥, 천장에 매달린 거울, 깜빡이는 전구를 통해 광주로 대변되는 국가폭력과 그 상흔을 곱씹게 되면서 이야기는 더 풍성해진다. 이들 작업은 상실과 상처를 치유해온 우리 노력이 얼마나 진정성 있는지도 돌아보게 한다.
"사라진 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추모비를 세웠으나, 고문과 수감 장소들이 폐허로 버려지는 상황에서 그들의 상처와 이야기를 인정하는 과정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카데르 아티아·'2018 광주비엔날레' 도록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비엔날레전시관, 무각사, 대안공간 핫하우스 등 광주 일대에서 전시가 열리는 '2018 광주비엔날레'는 11월 11일까지다.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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